농촌체험 살아보기, 하동 의신마을 28일째 ; 이병주 문학관 이종수 관장과 악양 최참판댁 탐방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최참판댁과 박경리 문학관을 둘러봤다. 이병주 문학관의 관장이자 시인인 이종수 해설사를 통해 최참판댁의 가옥 곳곳을 둘러봤다.
최참판은 만석꾼으로 200만 평의 토지를 소유했다. 악양 벌판이 55만여 평이니 고을과 고을을 잇는 규모의 거부였다. 여의도 면적의 2.4배 규모다. 축구장 970여 개가 차지하는 공간이니 최참판의 땅을 거치지 않고는 이동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리라.
봄날씨지만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안채의 뒷마당 장독대에서 바람을 피했다. 이종수 해설사는 "왜 여성들은 장독대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지성을 올렸을까?"란 질문으로 이야기의 문을 열었다. 장독대의 된장, 간장과 함께 장독대 곁에서 흔하게 보이는 붉은색 맨드라미는 변치 않는 충정과 함께 뱀과 악귀를 쫓는다고 한다. 새벽에 지성을 드릴 때 정화수에는 북두칠성이 담긴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칠성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영혼이 돌아가는 곳도 북망산(北邙山)이다. 영혼이 죽어 하늘의 북두칠성(北斗七星)으로 간다고 믿었다. 북쪽은 검은색(玄)인 죽음을 의미한다. 고구려 무덤에서도 북쪽을 지키는 신은 검을 현(玄)이 들어간 현무(玄武)다. 천자문의 하늘 天, 땅 地, 검을 玄, 누를 黃처럼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하늘은 왜 검을까? 하늘은 파란색인데. 사람이 죽으면 북두칠성으로 올라가기에 하늘을 검다고 옛날 사람들은 인식했던 것이다.
최참판댁의 윤 씨 부인이 기거하는 안뜰로 옮겼다. 남편은 건너편 사랑채에 머물렀는데 문은 보이지 않는다. 남녀유별로 인해 잠도 따로 잤다고 한다. 함께 잠을 청할 때는 남편이 하인을 통해 부인에게 기별하면 부인이 사랑채로 이동했다고 한다. 이때 문이 있으면 소리가 나기에 사랑채로 가는 곳에는 문이 없다고 한다.
안뜰과 하인들이 기거하는 행랑채 사이에는 중문채가 가로 놓여있다. 이는 안뜰에서 생활하는 여성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담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사랑채의 뒤편에는 뒷채가 위치해 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집안의 경제권을 건네는 상징인 곳간의 열쇠를 넘겨주고 뒷채로 물러난다. '뒷방의 늙은이'란 말이 '힘이 없어진 사람'을 이르는 말의 유래는 여기에서 나왔다고 한다.
부인이 기거하는 안채를 지탱하는 기둥은 사각형이고, 남편이 기거하는 사랑채의 기둥은 원형이다. 사각형은 땅을, 원형은 하늘을 의미한다. 땅은 동서남북의 방향을 가지고 있고, 둥근 하늘은 춘하추동을 의미한다고 한다. 기둥 하나에도 천지의 이치에 따라 건축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중문채, 뒷채 등의 배치부터 하나하나 스토리를 알아가면 평범했던 것도 특별하게 보인다. 단지 왜 여성이 땅이고, 남자가 하늘이어야 하는 불평등과 차별이 두드러지게 보일뿐이다.
안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초당이 위치해 있다. 초당은 초가지붕으로 엮은 자그마한 집이다. 3평 정도의 크기에 양반들이 머무르며 식솔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장소라고 한다. 최치수는 최참판댁 당주다. 그는 어머니에게 외면받고, 부인과 사별 후 재혼한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 초당에서 잠들었는데 노비인 귀녀와 결탁한 김평산에게 살해당한다. 모든 것을 가졌던 최치수가 토지의 등장인물 중 가장 불행한 인물이라고 한다. 행복이란 건강하게 지금을 즐기는 거다. 지금(present)은 선물(present)이다. 건강하게 지금 최참판댁을 돌아보는 체험자들이 행복한 거다.
박경리 문학관에서 31km 지점에 이병주 문학관이 있다. 박경리 작가는 1926년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여고를 졸업해 하동의 악양과는 인연이 없다. 25년 동안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악양일 뿐이다. 원래 최참판댁 배경은 전라도의 평야지대가 적합했는데, 작가는 경상도 출신이라 전라도의 사투리나 풍습이 서툴기에 하동 평사리로 선택했다고 한다. 박경리 문학관과 최참판댁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상가들이 즐비하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까닭이다. 토지가 TV매체를 통해 알려졌기에 소설 속 최참판댁 가옥을 평사리에 지었다.
그에 비해 이병주 작가는 1921년 하동 북촌 출신으로 현대사의 굵직한 줄기를 이룬 소설 <지리산>을 썼다. 이병주 문학관은 북촌에 고즈넉하게 외로이 앉아 있다. 표지판에는 문학수도 하동이 선명하게 보인다. 박경리 문학관에 비해 이병주 문학관은 빨치산과 함께 현대인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연필자국처럼 소멸되는 느낌이다. 덩그런 주차장만이 홀로 이병주 문학관을 곁에서 지키고 있다.
이 두 기념관은 마치 경주의 기림사와 불국사의 역사를 보는듯하다. 기림사는 한 때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릴 만큼 큰 사찰이었다. 현재는 기림사가 불국사의 말사로 전락(?)했지만 사찰에서 풍기는 멋은 훨씬 예스럽다. 오늘 하동 출신 거목인 이병주 문학관과 박경리 문학관을 둘러보고 느꼈던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