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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능력

풀꽃처럼 2021. 4. 8. 23:19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출2:10).

 

모세가 태어날 당시 바로는 히브리 인들의 남자 아이는 죽이고, 여자는 살리라고 명령했다.  모세는 죽을 운명이었고, 물에 버려진 모세는 바로의 공주에 의해 건져내었음을 당했다.  모세를 제외한 수많은 남자 아기들이 죽거나, 방주에 떠내려 보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으며 그대로 흘러가 죽었을 많은 아이들이 있음을 기억하자.  예수께서 태어날 때에도 헤롯은 두 살 아래의 모든 아이들을 죽이라고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역사를 이끄신다.  인간이 보기엔 엄청난 비극의 현장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 전지구적 코로나 위협과 미얀마 사태, 어디에나 있는 빈곤과 불균형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눈에는 보이진 않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여전히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의 지혜로선 이해할 수 없다.  수많은 시간이 흘러 뒤들 돌아볼 때 겨우 알 수 있을 지경이다.

 

모세는 히브리 민족을 이끈 위대한 선지자 였고, 예수께선 인류의 구원자이셨다.  성경 해석도 모세라는 승자(?)에 집중하다 보면 무수히 죽어간 사내아이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다.  대중 설교가 승자 중심으로 흐를때 수많은 대중 신자는 좌절을 겪는다.  대부분이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수 없고, 알 수 없고, 현실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불안과 슬픔의 뒤편에서도 역사를 이끄시는 분이라는 걸 볼 수 없다.  승자 독식 자본주의에 마취된 설교보단 현실을 직시하는 설교가 필요하다.

 

모세는 이집트 사람에 의해 물에서 건짐을 받았고, 홍해를 통해선 하나님에 의해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  역사는 아이러니 투성인 것이 현실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래서 비극이나 불행이 오더라도, 불의가 떵떵거리며 잘 살더라도 억울해하지 말고, 이웃의 아픔에는 공감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광경을 욥의 고난 가운데서 신음하며 견뎌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