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산골일기(하동 의신마을)

#010.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태양이 지구를 삼키는 날

풀꽃처럼 2023. 8. 15. 08:28

다이나믹한 산골에서 단조로운 휴일을 보내고 있다. 유시민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읽었다. 의신마을은 화개장터에서 20여분 정도 지리산 능선을 향해 올라야 한다. 화개장터에서 오른쪽으로 20여분을 달리면 구례 도서관과 매천 도서관에 닿을 수 있고, 왼쪽으로 20여분이면 하동 도서관에 갈 수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있으니 여러가지 장점이 많다. 지역에서 쓰는 말과 억양이 다르다. 5일장(3일, 8일)인 구례장터는 정겨운 시골풍경을 느낄 수 있다. 구례는 음식 맛과 커피가 떠오른다. 하동은 섬진강 하구의 넓은 평사리 모래사장을 걸을 수 있다. 화개장터에서 의신마을 구간은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축사는 없고, 지리산 국립공원 계곡이 오염되지 않은 채 잘 보존되어 있다. 화개면에서 생산되는 녹차는 스타벅스에 납품될 만큼 품질이 뛰어나다.

자연은 늘 변화무쌍하게 변화하지만, 산골의 인간계는 익숙해지면 지루해진다. 구비구비 흐르는 능선도 익숙해지면 뇌의 관심을 잃어버린다. 산골도 차츰 눈에 들어오는 정보들이 익숙해지면 뇌는 당연하다는 듯 무시한다. 더이상 변화무쌍한 산골의 장면에 뇌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익숙하게 되는 순간 뇌는 다시 게을러진다. 

책은 그렇지 않다. 책은 페이지 속에 새로운 정보들이 숨어 있다. 익숙한 책들은 휙휙 넘겨버리고, 새로운 분야의 정보는 뇌를 긴장시킨다. 1990년 6월 보이저 1호가 명왕성 부근을 지나면서(지구에서 61억km 지점) 촬영한 지구는 하나의 작은 점에 지나지 않았다.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으로 보이는 지구는 우주에서 먼지같은 존재다. 그 점 속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살인, 사기, 영웅, 희생, 배신, 갈등, 미움, 결혼, 이혼, 죽음 등 무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61억km 떨어진 지점에서 촬영한 지구

태양계도 은하계의 일부이고, 은하계 역시 우주에 비하면 먼지 크기다. 태양이 핵융합으로 빛을 발하는 수명은 100억 년으로 추정한다. 앞으로 50억 년이 지나면 태양이 부풀어 올라 지구를 삼킬 것으로 추정한다. 인간 수명이 100년인데 너무 앞선 걱정일수도 있다. 분명한 건 인간도 죽고, 태양도, 지구도 수명을 다한다는 거다. 태양도 인간도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고, 그 먼지는 또 다른 행성으로 태어날 것이다.

인간 수명 100년은 태양 입장에선 하루살이 만큼의 시간도 안되는 찰나(刹那)의 순간이다. 찰나는 75분의 1초(0.013초)다. 눈을 깜빡이는 0.1초보다도 짧은 시간이다. 인간이 하루살이의 허망함을 보듯, 우주에 비하면 인간의 수명은 하루살이 보다 짧다. 내 눈으로 보면 상처가 크게 보이지만, 남의 눈에는 무덤덤하게 보이는 것과 같다.

희노애락의 덧없음을 느끼면서도 오늘 주어진 순간을 덤덤히 수용하는 것도 하루살이 인간의 자세다. 다가서는 시간을 맞으며 나아가기도 버티기도 하는게 인생이다. 산골에 있든 도시에 있든 국내든 국외든 시를 쓰든 만화를 보든 찰나의 행복을 누리는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적해다. 행복을 누릴 수 없다면, 행복해 지지 않을려는 선택을 피하는게 차선책이다.

지구에 살지만, 탈지구의 관점에서 나를 보면 우주의 광활함도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잠시나마 위안이 된다. 땅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낮은 곳과 높은 곳의 차이을 느끼지만 우주에서 보면 한 점 지구일 뿐이다. 그래도 지구에 발을 딛고 있는 만큼 오늘의 슬픔도 기쁨도 일희일비하며 살아가야 하는 하루살이 인생이다.

매천 황현(1855~1910) 도서관. 1910년 한일병탄을 통탄해 구례에서 음독자살한 황현 선생을 기려 만든 도서관

휴일 산골의 하루도 구례 매천도서관에서 책 속을 여행하고 있다. 지구에 있지만 책을 통해 우주에서 탈지구를 바라보며 우주여행 한 번 잘 했다. 육체로 우주여행을 할 수는 없지만 책 속에선 태초부터 멸망까지 뇌의 시냅스들의 도움으로 값진 경험을 뇌 속에 새겨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