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독서로 훑어본 삶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는 ‘인간의 얼굴은 한 권의 책이다’라고 말했다. 얼굴을 읽으면 그 사람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리라. 눈이 마음의 창이듯이 얼굴에는 그 사람의 내면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몸동작이나 말투에서도 그 사람을 읽을 수 있지만 첫인상에서 풍기는 그 사람의 흔적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얼굴이다. 얼굴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한 만큼 내 삶을 책이란 주제를 통해 돌아보고자 한다.
책을 읽었던 기억은 초등학교 4~5학년 정도가 가장 이른 시점인 것 같다. 모두가 가난했던 환경이어서 책을 사서 읽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앞 뒷장이 떨어져 나간 책이나 철 지난 잡지 등을 무작정 반복해서 읽었었다. 중학생들이 사용했던 지리책이었던『사회과부도』를 수없이 반복해서 본 기억도 난다. 등고선이 새겨진 세계지도와 각 나라의 위치와 수도를 외웠던 기억이 있다. 이웃집에 갔더니 소년소녀문학전집이 있어 『서유기』란 책을 빌려서 읽었다. 이 책이 아마 책표지와 내용이 훼손되지 않은 100%인 책이었던 것 같다. 손오공과 삼장법사 일행이 인도로 모험을 떠나는 서사물이었는데 재미가 있었다는 잔상이 뇌에 아직도 남아 있다.
이후 초등학교에선 교과서를 드문드문 읽었던 기억과 함께 중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때는 학교 도서관을 충실히 이용했던 것 같다. 그 당시는 청소년기라서 그런지 추리물에 끌렸다. 기초 과학에 대한 책도 읽은 기억이 있다. 『셜록홈스 시리즈』를 가장 많이 빌려서 본 것 같다. 탐정물 답게 하나하나 추리해서 나가는 장면들이 재미있었다. 그 외 문학작품은 읽은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치밀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추리 소설 스토리는 알게 모르게 내 인생의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선 모두가 동아리에 가입해야 한다는 학교 방침에 따라 자연스럽게 독서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 당시는 삼중당 문고 시리즈가 독서 동아리방에 있어 빌려보았다. 김동인의 『감자』, 톨스토이의 『부활』,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등 국내외 다양한 문학작품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도 하고, 토론을 했던 기억이 난다. 청소년기에 영향을 끼쳤던 책은 누구나 그렇듯 헤르만 헤세의 작품인 것 같다. 알에서 깨어 나올려는 시기인 청소년이기에 『데미안』은 잘 읽혔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청소년기의 작품 하나를 꼽는다면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이 될 듯하다. 평범한 갈매기들이 먹이를 구하기 위해 낮게 나는 것을 거부하고 더 높이 날아올라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고독한 갈매기의 모습이 청소년 시절의 감성에는 적합했었나 보다. 그 영향일까, 아니면 내 성격이 그런 걸까 같이 있기보다는 혼자 있어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주말이면 시외로 나가 자연 속에서 시를 짓고, 낭독하며 낭만적으로 보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선 원 없이 책을 읽었다. 군대를 다녀온 후 서점에서 샀던 이은성 작가의 『소설 동의보감』(창작과 비평사)이 가장 뜨거웠던 책이었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은 문학작품보다는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저항했던 인문사회과학 도서를 당연스럽게 읽었다. 판금 조치된 책들을 파는 대학가의 인문사회과학 도서 전문 서점에서 구입해서 읽었던 책들이 주류였다. 그러나, 『소설 동의보감』처럼 가슴이 불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책은 없었다. MBC에서 드라마로 제작한 『허준』은 책의 내용과 달라 실망했지만, 책에서 풍겨 나오는 민초들의 삶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장면들에서 가슴이 화산처럼 분출하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간한 책들은 의심 없이 사서 읽었고, 『소설 동의보감』이 미완의 작품이라 더욱 애착을 가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외 백기완, 함석헌, 마르크스, 마오쩌둥 관련 책들도 많이 읽었다. 4학년 취업면접을 보러 새마을호를 타고 왕복하며 읽었던 마오쩌둥의 대장정의 다룬 『중국의 붉은별』 이 인상에 남아 있다.
대학시절 많이 읽었던 책들이 지금껏 삶을 지탱해 오는 뼈대가 되었다. 인생을 보는 관점을 정립한 책은 『닥터 노먼 베쑨』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의사로서 참전했던 노먼 베쑨은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지만, 더 큰 사회의 악을 없애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드러난 상처보다는 상처가 일어난 구조를 바꾸는 진정한 휴머니스트의 삶을 살았던 궤적처럼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뼈에 새겨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사회복지 환경과도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GDP 10위권 국가로 도약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그 구조의 허술함을 보는 것 같다. 노인자살률, 노인빈곤율, 출산율, 빈부격차, 최장 노동시간, OECD 평균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복지지출이 현 한국사회의 복지현장이다.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증명해야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는 나라, 송파 세 모녀 자살 등 불행한 사건 앞에 한국의 복지는 권리가 아니라 시혜에 가깝다. 외형은 선진국처럼 갖췄는데 내면은 후진국 수준이다. 복지가 국민의 당연한 권리가 될 때 비로소 인간의 존엄해질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생각구조를 바꾼 책으로는 홍세화의 『생각의 좌표』가 떠오른다. 돈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을 배운 책이다. 미디어들이 말하는 것을 비판할 수 있는 생각의 구조틀을 배운 책이다. 분단국가의 현실에서 청년이면 누구나 고민했던 시절에 리영희의 작품은 그동안 받았던 교육이 국가에 의해 주입된 것이며, 사회현실을 직시하는 바른 길로 인도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의 책을 꺼내 들면 오염되었던 마음이 다시 제자리로 찾아올 정도로 힘이 있는 책들이다. 1990년 대학 3학년 당시 ‘조직관리’ 교수가 소개해 주었던 고원정의 『빙벽』시리즈는 한국의 군대문화를 고발한 책이다. 매번 시리즈가 나올 때가 되기를 학수고대했던 기억이 떠오를 정도로 군대의 비뚤어진 문화를 고발한 책이다. 한국 사회에 여전히 버티고 서있던 빙벽들에 균열을 내고 허무는데 힘이 되는 소설이 아닌가 하다. 감추고 덮으려는 군대문화는 여전히 있다. 2023년 여름 폭우에 실종됐던 주민을 수색하던 채수근 일병은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구명조끼도 없이 귀신 잡던 자랑스러운 해병대원은 귀신이 되었다. 그는 외동아들이자 장손이었다. 여전히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책은 꾸준히 읽었다. 직장 내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책을 읽는 것만큼은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업무 관련 도서와 개인적 관심을 끄는 책들을 꾸준히 읽었다. 대학시절 읽었던 사회과학 서적은 세상을 보는 틀과 구조를 수립한 책들이었다면,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실용서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경제경영 관련 서적과 자기 계발, 리더십 관련 책들로 자연스럽게 이동되었다. 이러한 책들을 꾸준히 대량으로 읽다 보니 한계점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뻔한 얘기들을 반복해서 되풀이하거나 다른 관점으로 보는 책들이었다. 해운대 앞바다의 출렁이는 물결만 다루었지 그 물결 밑에 도도하게 흐르는 구조적인 물결은 볼 수 없는 치명적인 단점이 드러났다. 자연스럽게 역사 등 인문 관련 서적으로 회귀하는 독서경험을 했다. 지금은 예술과 과학 관련 책들을 조심스럽게 보고 있다. 어떤 분야의 책이든 그 시대를 이끈 것은 혁신이었고, 혁신이란 관점에서 역사와 예술, 과학, 철학은 그 뿌리가 같다. 자라온 삶이 다양한 분야로 펼쳐졌다가 나이가 들수록 모아지듯 나의 책 읽기도 그렇게 다양한 분야를 차츰 통섭이란 단어로 모이는 경험을 하고 있다.
직장을 다니면서 각종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료를 만들어야 설득력이 있기에 꾸준히 데이터를 기록했다. 독서와 관련해선 2003년부터 매년 읽은 권수와 그에 해당하는 도서 구입액 추이를 알 수 있다. 2003년부터 기록한 독서기록장은 단행본으로 만들어 책장에 보관하고 있다. 기록은 단순히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기록을 눈으로 보면 구체화되면서 다음 목표를 향한 기준점이 된다. 인생이란 궤적도 기록하지 않으면 그날그날 휘발성이 되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다. 2005년 81권을 읽었고 책값은 99만 8천원이었다.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에 실제도 구입한 책은 훨씬 많다. 아마도 30% 이상은 책을 구입해 놓고 읽지 않은 채 지냈던 것 같다. 책장에는 사놓고 읽지 않은 책, 읽고 있는 책, 읽어야 할 책들로 늘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내가 읽어야 할 책, 읽은 책, 다른 사람에게 선물한 책들을 포함하면 한 달 평균 20만원 이상은 족히 지출했었던 것 같다. 2013년은 직장생활에서 바쁜 시기였지만 읽은 책은 191권에 달했다. 바쁠수록 책 읽기는 그 바쁜 틈을 쪼개가며 읽었기에 절박함으로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14~2015년은 책을 읽었지만 인생에서 힘든 시기였기에 기록할 여유조차 없었다. 최근에 들어서 책을 적게 읽은 연도는 인생의 저점이거나 방황기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안정을 찾아가는 시점이 되니 책을 읽는 양도 많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책을 읽은 권수에 따라 인생의 굴곡이 새겨진 것을 확인한다.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어떤 해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나의 인생은 읽은 권수를 보면 내 인생의 나이테를 관찰할 수 있다.
독서는 내가 경험하지 않는 분야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효과가 있다. 2024년 여름 사회복지현장 실습은 중증장애인 시설에서 지냈다. 장애인들을 가끔 보는 것과 하루 8시간 함께 하는 삶은 완전히 다르다. 한국은 장애인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회이다 보니 더욱더 장애인을 만나기 어려운 환경이다. 한 달간의 짧은 기간이니 되도록 접해보지 않은 어려운 환경에서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에 중증장애인 시설로 실습을 결정했다. 처음 만난 중증장애인들은 눈동자는 나를 보지 않지만 미소는 나를 향해 짓고 있었다.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그의 몸짓에선 나를 향한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처음의 낯섦은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신체를 함께 맞대며 비장애인들보다 더 친근해지는 경험을 했다. 중증장애인들에 대해 알 수 없으니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책들을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 장애인인 김지우의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책에선 사람을 장애인과 미장애인으로 구분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노인이 되면 시력, 청력, 근력 등에서 장애인이 된다. 사와다 도모히로의 『마이너리티 디자인』은 중증장애인과 정상인이 차별 없이 함께 운동을 하는 사회를 꿈꾼다. 저자의 아이가 중증장애인이기도 해서 더 실감이 났다. 홍은전의 『노란 들판의 꿈』은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 등을 다룬 내용을 통해 장애인의 고충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재일교포인 중증장애인이 연극단을 꾸려 활동하는 내용 등을 통해 짧은 기간 장애인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한 달간의 기간이었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분야에서 장애인과 함께 느끼며 읽었던 책들을 통한 좋은 시간들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도 일본이나 대만처럼 지하철에서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도 혼자서 자연스럽게 다니는 장애인의 이동권이 현실이 되기를 꿈꾼다.
지금도 책들을 대할 때면 설렌다. 특히 신간 코너에 어깨를 비집고 서있는 책 등에 드러난 제목을 볼 때마다 보물을 찾는 듯한 느낌이다. 설레는 분야를 만났을 때의 두 손안에 담긴 책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그 책 내용에서 소개된 책들을 찾아가는 여정은 길을 걷는 여행처럼 마음으로 걷는 여행이 된다. 과거, 현재, 미래를 책을 통해 간접경험하는 인생이 즐겁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사무엘슨(Paul Samuelson)은 행복은 소유를 욕망으로 나눈 값이라고 공식으로 발표했다. 분자인 소유의 크기를 크게 하던가, 분모인 욕망의 크기를 줄이면 행복은 최대화된다. 소유는 크게 할수록 인간의 욕망은 더 커진다는 게 인간 역사가 증명하기에 소유의 크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은 욕망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행복에 가까이 가는 길이다. 특히나 오늘날은 소비자본주의라고 할 만큼 상품은 넘쳐나고 기업들의 소비를 촉진하는 마케팅은 24시간 편재한다. 그런 점에서 행복에 가까운 것은 내면의 욕망을 제어하는 힘이 있는 책 읽기가 아닐까.
서두에서 ‘인간의 얼굴은 한 권의 책이다’고 언급했었다.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온 길들이 드러난다. 눈을 통해 나오는 눈 빛, 입을 통해 나오는 말투, 눈가의 주름 미소를 통해 드러나는 배려심, 얼굴은 그 사람이 지나온 흔적이 쓰여있는 책이다. 내 얼굴 역시 그렇게 지금도 쓰이고 있다. 과거에 읽은 책이 지금의 내가 되었고, 지금 읽는 책들이 미래의 내가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하기도 한다. 책 읽기는 사색의 과정이다. 중국의 문학가 린위탕(林語堂)은 가난해서 영화관에 갈 형편이 되지 않을지라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으로 등잔을 밝혀 책을 읽는 즐거움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유의 크기보다는 욕망의 절제에 충실한 사례다. 책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와 친근하게 지낼 것이다. 집에 있든 여행을 가든 책은 언제나 내 곁에 머무를 것이다. 책은 내 인생 그 자체이고 흔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