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여기는 노인이 없네?
여름이 일어섰다. 여름이 일어서니 땀도 피부를 헤집고 세상 구경에 나선다. 해는 비치지 않아도 여름이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날씨다. 서둘러 점심을 먹고 송림공원을 걸었다. 공기는 맑고, 섬진강은 조용히 흐르고, 재첩잡이 어선은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사방이 온통 녹색기운으로 가득하다. 온누리에 차분한 평화가 내려앉았다.
한낮의 송림공원은 차갑고 맑다. 배고픔을 채워 무거워진 위를 가볍게 하기 위해 걷는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살기 위해 배출해야 한다. 몸뚱이는 채워지고 비워지기 위한 통로여서 쉴 새 없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해야 한다. 숨을 쉬는 동안은 입에서 항문까지 넣고 비워야 한다. 비우기 위해 먹어야 하는 숙명이다.

송림공원은 하동에 있는 수령 300년의 소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이다. 저마다 몸을 비틀며 중력을 이겨내고 꾸역꾸역 올라가는 모습이 인생의 지나온 흔적 같다. 공원의 길이는 2km 정도이나 산책길은 약 1.3km 둘레길로 조성되어 있다. 맨발로 걷는 사람, 유치원의 야외수업, 간간이 보이는 청춘남녀로 송림공원은 사람이 있어도 숲이 주인인 듯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공원의 둘레를 걷고 있는데 귓가로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는 노인이 없네”
그러고 보니 노인들이 한 명도 없다. 도시의 공원은 노인들의 해방구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노인들은 바둑과 장기를 둔다. 벤치마다 장기판 아니면 바둑판이다. 그 주위에 허연 머리들이 판세를 훑어본다. 시골의 공원은 그렇지 않다. 노인들은 보이지 않는다. 4월부터 시작되는 찻잎 따기, 5월과 6월은 고사리 꺾기에 바쁘다. 평소에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고사리 철이 오면 산에 오른다. 병원 약값이 더 들면서도 몸은 고사리 밭으로 향하는 시골 노인들이다.
게다가 시골은 대중교통이 불편하다. 한 달에 6번 정도 열리는 장날이 되어야 읍내에서 노인들을 볼 수 있다. 시골의 노인은 바쁘다. 밭도 매야하고, 철 따라 따야 하는 농작물로 농한기를 제외하고는 쉬지 못한다. ‘시골은 굶어 죽지 않는다’는 말이 그냥 생긴 말이 아니다.
도시의 노인은 무료하다. 소득은 쪼그라들었다. 아파트의 갇힌 공간에 있거나 지하철 속에 있거나, 노인들의 해방구인 공원에 모인다. 소수의 노인들을 제외하곤 도시의 노인은 따분하다. 65세부터 장장 30년간을 노인으로 살아야 하는 시간인데 노인들이 갈 곳은 선택지가 없다.

부산의 경우 경로당은 80세 이상, 노인 복지관은 75세 이상이 주 이용층이라고 한다. 60세부터 80세까지 모일 공간이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도시는 움직이면 돈이 들어간다. 돈을 뜯어내는 촘촘하게 엮인 그물망을 빠져나갈 수 없다.
시골에 노인들은 많지만 노인들은 없다. 노인들은 저마다의 공간에서 바쁘게 살고 있다. 도시는 점점 늙어간다. 칙칙한 회색빌딩처럼. 해야 할 일이 없는 도시 노인들은 해야 할 일이 없는 공원으로 오늘도 비둘기처럼 모여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