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ctrl+c, ctrl+v 치트키 신공
ctrl+c(복사), ctrl+v(붙여 넣기)는 웬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문서작성 신공 키조합이다. 문서작성 이외에도 과제물 작성, 각종 연례 행사등에서도 자주 쓰는 치트키다. ctrl+c 키는 인간 뇌가 진화하면서 익숙한 것에 에너지를 덜 사용하는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기존 정보에는 최소한의 자원을 투입하고, 새로운 것에 최대한 자원을 집중함으로써 살아남기 위한 무의식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복사와 붙여넣기에 자동적으로 길들여지면 변화에는 일단 저항한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면 본능적으로 반응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미지근한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익숙한 것은 변화가 없어 편한 반면 독이 될 수도 있다.
최근 전지구적 기후변화로 인해 농작물 수확이 널뛰기를 하고 있다. 사과와 배 가격이 급등한다. 2023년은 대봉감 흉작으로 곶감이 금값처럼 높았고, 올해도 9월말까지 이상기온이 이어지며 농약과 물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한 감들은 상품이 되기 전에 후두득 땅으로 서둘러 떨어져 버렸다. 인간에 의해 자라는 농작물 대부분이 기후변화에 취약하다.
얼마 전에는 고기에 배추를 싸 먹어야 하는 배추가격 폭등이 있기도 했다. 올 봄 하우스 딸기도 이상기온을 비껴가지 못했다. 하우스에서 재배하는 농작물도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는다.
이상기온에도 불구하고 혁신에 성공하는 딸기농가도 있다. 거창 봉농원의 봉딸기는 딸기명인 류지봉 씨가 운영 중이다. 일반적인 딸기하우스와는 달리 6천 평의 대규모 하우스에서 딸기를 2층으로 재배한다. 농약도 기계로 살포하고, 2층으로 운영하기에 인력과 시간이 1층에 비해 2배 이상의 효과를 거두어 평균이상의 수익을 올린다.
과거처럼 ctrl+c, ctrl+v 사고방식에선 혁신이 나올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기에 환경변화에 적응이 뒤처진다. 소규모 농가들이 겪고 있는 시골의 현실이다. 기업에서도 매년 예산을 제로베이스로 수립할 것을 지침으로 요구하지만, 정작 사업계획서는 작년의 형태를 답습하는 결과물이 나온다.
서울에서 지역으로, 시골로 갈수록 ctrl+c, ctrl+v 치트키를 사용하는 빈도가 높은 것 같다. 읍면 사무소의 행사 등은 전형적인 ctrl+c, ctrl+v가 난무한다. 그 내용도 전임 수장, 전전임 수장, 온갖 초대명단 챙기는 곳에 에너지가 낭비된다. 체육대회 주인공은 읍면의 주민이지만 개최하기 위해서는 길고도 지루한 초청명단을 거쳐야 한다. 초청명단을 확인하고 자리에 안내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과감히 축소하여 적은 직원으로 주민에 집중하는 행사가 되면 좋지 않을까?
하동읍 예장소속 모교회에서 매주 발행되는 주보에는 남성 은퇴목사, 은퇴장로, 협동은퇴장로, 원로장로, 협동장로 등 봉사하지 않는 직함들이 고정면을 차지한다. 정작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여성 권사는 일체 언급이 없다.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이자 사람냄새, 자리냄새가 많이 난다. 남녀차별과 계급(?)이 없어야 할 교회 주보의 형태만 보더라도 발을 들여놓고 싶진 않다.
혁신(革新)은 기존 가죽을 벗겨 새롭게 변화에 적응한다는 말이다. 가죽을 벗기는 고통은 새로운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관행대로 업무를 처리하기는 편하다. 시간도 절약한다. 기존대로 하는 농사도, 전임자가 처리한 대로 하는 것이 훨씬 힘이 덜 든다. ctrl+c, ctrl+v 치트키가 ‘하던 대로’라면, 혁신은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에 대해 의문부호를 던지는 과정이다.
옆으로 뻗은 애기땅빈대는 길이를 아무리 길게 뻗는다고 해도 높이가 높아지지는 않는다.
“식물은 위로 뻗어야 한다.”
“다른 식물보다 높이 뻗은 식물이 성공한다.”
애기땅빈대는 그런 식물 세계의 상식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생장에서 중요한 것은 높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잡초들의 전략(2024)》
빈대를 닮은 잎이 땅바닥에 바짝 붙어 자란다고 해서 땅빈대인 잡초는 시골밭에선 우후잡초다. 비가 온 후 밭에 가보면 뻥튀기한 것처럼 서식지를 넓힌다. 애기땅빈대는 다른 풀처럼 수직으로 자라지 않는다. 높이 뻗는 것이 성장이란 통념을 깨버린다. 다른 풀들보다 높이 올라 꽃과 나비를 유혹하는 레드오션보다는 낮은 곳을 선택했다. 높은 곳의 화려한 꽃에 시선을 집중하고 꿀로 벌을 유혹할 에너지 대신, 분비물을 내어 개미들을 유인하기에 꿀의 양이 적어도 된다. 수정을 위한 비용을 최대한 절감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애기땅빈대는 위로 크는 것이 성장이란 통념과 꽃과 꿀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통념을 벗어나 새로운 성장과 번식이란 개념을 제시한 혁신가다. 낮은 곳에 있기에 신발이나 동물 털에 붙어 이동도 가능해 번식력도 왕성하다. 기존 풀들처럼 ctrl+c, ctrl+v를 택했다면 치열한 생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인간은 잡초보다 과연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장 진화한 잡초에게서도 한 수 배우는 산골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