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산골일기(하동 의신마을)

#043.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산산조각

풀꽃처럼 2024. 10. 14. 10:11
킨츠기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찻잔. 출처: https://bit.ly/3NpDsqw

한국에서는 조금 깨진 잔이나 그릇은 버린다. 중국은 반대로 오래된 식당일수록 이 빠진 그릇과 잔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그릇이나 잔이 오랜 기간 동안 금 가거나 깨진 것일수록 전통이 있는 가게(老字号 라오쯔하오)라는 증거의 하나로 여긴다. 일본은 깨진 그릇을 이어 붙여 탈바꿈하는 킨츠기(金継ぎ)를 통해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으로 변신시킨다. 깨진 잔이나 그릇에 대한 한중일 3국이 다르게 반응하는 문화의 차이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 발생한 사건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그 사회의 문화로 굳어진 것뿐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기복을 넘나 든다. 희로애락이 불규칙적으로 인생의 고저장단을 형성한다. 자신의 인생은 자기가 만들어나간다고 하지만 정작 세상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대의 흐름에 의해 떠밀려간다. 마침 그때 그 자리에 있었기에 흘러 흘러 바다로 나가는 경우도 있고, 두메산골 웅덩이에 머무를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다. 한마디로 ‘운(運)’이다. 신의 뜻은 알 수 없기에 ‘運’이라는 단어로 퉁치는 게 인생이다.
 
행운과 불운은 자기의 의지와는 연관성이 거의 없다. 자신의 의지보다는 단지 운이 좋아서 그 자리에 있을 뿐이며, 신을 믿는 사람은 신의 뜻이리라. 성공 했을 때는 자신을 내세우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다른 핑계를 끌어들이는 게 인간이란 동물의 유전자다.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하지만, 알 수 없다. 운명(運命)은 끊임없이 이동(運)하라는 명령(命)이다. 이전에는 옳았던 것이 언제든지 옳을 수는 없다. 수시로 존재에 대해 질문하며 답 없는 질문을 거듭해야 한다.
 
누구나 산산조각 난 인생의 성적표를 손에 들 수 있다. 투수는 만루 상황에서 역전 홈런을 맞기도 한다. 타자는 환호성을, 투수는 산산조각을 맛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환경에 의해 자신의 그릇이 사방으로 깨어진 경험을 누구나 맞이할 수 있다.

프랑스 생트샤펠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출처: https://bit.ly/3Nlg2mi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조각난 유리들을 재결합하여 탄성을 자아내는 작품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중국처럼 깨어진 그릇 그대로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노포(老字号 라오쯔하오)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일본의 킨츠기(金継ぎ)처럼 깨지기 이전보다 더욱 가치가 높은 예술품으로 재탄생할 수도 있는 것처럼 조각난 인생도, 조각난 마음도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
 
시적 언어로 마음의 깊은 곳을 건드리는 작가 한강이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소년이 온다』는 광주항쟁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다루었다. 국가의 폭력에 의해 산산이 조각조각난 시민들의 상처를 다룬 소설이다. 그 조각조각난 상처의 파편을 주조한 활자를 주우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과 질문의 터널로 이끈다.
 
<산산조각>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대로 살아갈 수 있지
 
내 삶이 하나의 종이라면 그 종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나는 산산조각 난 내 삶의 파편을 소중히 거둔다. 깨어진 종의 파편 파편마다 맑은 종소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정호승,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2020)』
 
산산조각 나면 산산조각 난대로 살아내는 게 인간의 운명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