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산골일기(하동 의신마을)

#052.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30년

풀꽃처럼 2024. 11. 15. 10:18

오늘은 화개면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이다. 보름 전 받았던 전화는 30년 전 대학친구였다. 1, 2학년은 풋내기 시절이었다. 2학년 대부분 의무적으로 군대에 징집을 당했다. 3학년에 복학하면서 현역병과 방위병 복무에 따라 동기지만 1년 빨리 수업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4학년이 되면서 학교 수업일수는 줄어들었고, 취업 아닌 취업준비를 했다. 한 명은 굴지의 조선업체로 다른 한 명은 철강회사에 입사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 저마다의 일터에서 분주하게 살았다. 대학교 시절 잔디밭에 앉아 보냈던 낭만적인 자리는 사각형 사무용 책상에 앉아 노동자의 복무에 충실했다.
 
국가부도인 IMF를 건너왔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도 겪었다. 직장의 위계질서 속에서 다들 치열하게 살았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다. 먹여야 할 식구가 있었고, 회사의 선후배와 동료들 간의 모임에 집중했다. 그렇게 해가 지나면서 진급도 하고, 그 만큼의 스트레스와 책임감도 몸에 새겼다.
 
배에는 적당한 언덕이 솟아올랐다. 탱탱했던 피부는 30년이 지나면서 세월의 흔적이 골짜기를 따라 조금씩 깊게 파여갔다. 검은 머리는 성성해지면서 백화 되었다. 이제 다들 직장에서 물러났다. 인생 2막이 시작되면서 30년 만에 편안하게 만났다.
 
얼굴의 윤곽은 그대로 남아있다. 풋풋했던 청년들의 겉모습은 중년이 되었다. 대학생활의 공통된 주제 대신에 몸 담았던 30년 직장에 관한 전문지식이 첨가된 대화가 된다. 이제 어깨에 짊어졌던 짐을 덜어내어서일까. 하나하나 뼛속에 가라앉았던 기억들이 툭툭 깨어난다.
 
다들 아름답게 늙어서인지 외모는 변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순수하게 보인다. 대학 생활에선 미래가 불투명했지만, 30년이란 터널을 지나면서 이제 예측할 수 있는 수입과 예측할 수 있는 생활이 되었다. 다시 만나기 전까지 서로의 존재를 잊고 살았지만, 이번 만남을 통해 우정이 깨어남을 느꼈다.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도, 마음 한 켠에는 항상 그 친구들이 있었던 것 같다.
 
점심을 먹고, 통창으로 숲이 보이는 카페에서 대화는 이어진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화개골의 다원에 앉아 우전과 홍차, 블랜딩 된 차를 마시면서 경치와 대화를 즐긴다. 30년이란 긴 시간은 흘렀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서일까. 배려는 친구든 누구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힘이 있다.
 
호텔로 옮겨 친구가 가져온 와인과 편의점에서 구입한 일본 소주와 맥주로 밤이 늦도록 대화는 이어진다. 30년을 어찌 하루이틀에 다 메울 수 있을까. 앞으로 30년이면 아마도 누군가는 우주의 먼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80세까지 직장생활을 이어가겠다는 친구를 응원한다. 그렇게 각자가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날들이.... 이제는 친구를 돌아보는 시기가 되었다. 다들 스마트폰에 온 문자를 보려고 안경을 머리에 올리고, 얼굴을 화면에 밀착시켜 집중하는 노안이 된 모습도차도 보기 좋은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