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INTJ vs INFJ
일을 할 때는 ‘면도날’이라고 불릴 만큼 예리하게 문제점을 지적, 경고는 하되 징계는 하지 않았다. 나서기보다는 목각인형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해 조정하는 역할로 만족스러웠다. 나서지 않되 뒤에서 작전을 수립하는 작전참모 스타일에 가까웠다. 감정보다는 데이터에 기반해 미래를 예측하여 실행하고, 과정을 점검하며 새로운 계획안을 지우고 반복했다.
마땅히 해야 한다면 ‘피’를 흘려서라도, 그 피를 ‘내 손’에 묻혀서라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론 주고 받는 정치적인 타협도 논리적 타당성에 근거해 장기적으로 이득이 되어야 결정했다. 달성 불가능한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주기적으로 수정해 가며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보며 나아갔다. 팀내에서 함께 일을 했지만, 혼자 해결하는 것을 선호했다.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는 마이어스-브릭스 성격 유형지표다. 심리학자 캐서린 쿡 브릭스와 그녀의 딸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가 개발한 성격 유형 검사로 사람들의 성격을 네 가지 범주로 나누고, 모든 사람을 16가지 주요한 유형으로 분류한다.
시골에 오기 전 MBTI 유형은 INTJ였다. 혼자만의 시간을 중요시하고, 미래의 가능성과 추상적인 사고, 논리분석적이고, 계획을 세우는 유형이었다. 2023년 산골로 들어온 후 검사한 결과는 INFJ였다. 독고다이 T에서 공감 능력과 타인의 관계와 감정을 이해하려는 F로 바뀌었다.
남성은 갱년기를 기점으로 여성호르몬이 남성호르몬을 압도해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일이 많아진다. 이전에는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을 장면에서 격한 감정이 눈물로 분출되곤 한다. 압박감있는 조직생활에서 벗어나 자연인이 되어 유순해진 영향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60년 가까운 세월의 깊이와 폭을 지나오면서 논리분석적인 것보다는 서로의 관계가 장기적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몸이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청춘은 날이 서있어 조금난 건드려도 날카로움에 베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날이 선 돌은 둥글둥글한 조약돌로 변해간다는 것을 타인을 통해서도 확인했다.
모든 것을 수용하고, 모든 것에 인자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지내다 보니 만물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문 둥근 원처럼 느껴진다. 내가 내민 주먹이 돌고돌아 결국 내 등을 때리고, 내가 내민 악수가 돌아돌아 등을 감싸 안은 경험을 한다. 사람은 튀어봤자 100년이란 걸 100년이 가까워 지면서 희로애락이 덧없음을 느낀다.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김훈, 『허송세월』 중
김훈의 책들을 읽으면서 이처럼 쉽고 정겹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그의 글은 언제나 건조했고 무거웠었고 날이 서있었다. 숨이 멎으면 모두가 물질의 최소단위인 원자로 해체되었다가 어디선가의 책상소재로 노트북으로, 식물이나 동물의 먹이로 환원될 것이기에 삶은 가벼움으로 무거움을 이고 갈 수 있다. 새도 자유롭게 날기 위해 뼛속을 비운 것처럼 삶을 가벼움으로 만들어야 자유로울 수 있다. 나이들수록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공부를 하는 게 도움이 된다.
나는 책을 자꾸 읽어서 어쩌자는 것인가. 책보다 사물과 사람과 주변을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늘 다짐하면서도 별수 없이 또 책을 읽게 된다. 김훈, 『허송세월』 중
MBTI의 성격유형에서 내향형(Introversion)이 강한 유형이라 밖으로 나가려 시도하다가도 늘어났던 고무줄이 그 원점으로 돌아가듯 혼자만의 책 속에 머무는 반복적인 산골생활이 되고 있다. 깃털보다 가볍게 흩날리며 흩뿌려지는 자연스러운 산골의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