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악착보살
악착(齷齪)같이 덤벼드는 사람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자식들을 위해 악착같이 생계를 이어나가는 모성도 그렇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해내고야 말겠다는 악착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이를 앙다물고 이마에 깊은 주름을 새기고, 온 힘을 주먹에 끌어모으는 앙칼지고 다부진 모습이리라. 악착할 악(齷)과 악착할 착(齪)이란 두 한자에는 모두 이(齒)가 들어가 있어 쉽게 수긍이 되는 단어다.



청도 운문사, 서울 길상사, 영천 영지사에는 극락으로 가는 배에 아래로 늘어뜨린 외줄에 앙증맞은 사람이 매달려 있다. 그가 악착보살이다. 극락으로 떠나는 배 시간에 늦어 사공이 던져준 외줄에 매달려 극락으로 들어가는 악착스러움에 악착보살이란 이름을 얻었다.
(가나안)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였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낳았다. (마 15:27~28 새번역)
유대인이 멸시하는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의 딸이 병에 걸려 예수께 도움을 청하고, 거절을 당하자 그 여인은 악착같이 예수를 붙든다. 자신이 개취급을 받더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먹고야 말겠다고. 예수는 그 믿음을 보고 딸의 병이 치유되는 장면이다. 거절을 당하더라고 악착같이 붙드는 것과 극락으로 떠나는 배에서 던져준 밧줄을 붙들고 한쪽 신발이 떨어질 정도로 외줄에 악착같이 매달려 가는 간절함을 갈구하는 인간의 단면이다. 극락이든 천국이든 인간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악착같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외줄을 붙드는 모습이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엇이든 실낱같은 희망을 갈구하는 약한 모습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추켜세우지만 자신의 머리털 하나도 희거나 검게 만들 수 없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게 인간이다.
And when the broken hearted people
Living in the world agree,
There will be and answer, let it be. Beatles, 《Let it be》
우리가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조차도 ‘그대로 두어라’처럼 인간은 순응할 수밖에 없다. 혼자 악다구니를 해봐야 뒷발로 가시를 차는 고통이 더해진다. 그냥 그대로 맡길 때 시간은 저절로 치유한다. 신에게 도움을 바라지만 늘 그렇지 못하기에 번뇌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인간의 기도가 신에게 의탁한 후, 스스로 위안을 받고는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자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냥 그대로 있으면, 작은 웅덩이에 돌이 던져지고 그대로 두면 다시 잔잔하게 되듯 시간은 치유하는 힘이 있다. 아니 인간의 망각하는 어리석음이, 가까운 사람이 죽어도,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받아 도저히 먹을 기운이 없을 것 같지만, 위장에 음식물을 꾸역꾸역 채워야 하고, 시간이 되면 배설해야 하는 반복된 삶이 증오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대로 두면 그렇게 아픔과 상처는 나무의 옹이처럼 나무와 함께 살아간다.
신은 항상 인간에게 답변하지 않는다. 신이 언제나 응답하는데 인간이 어리석어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인간은 뒤틀린 나무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증거다. 그러니 그대로, 그대로 두면 잔잔해진다는 지혜의 속삭임(Whisper words of wisdom)처럼 신께 기도하고, 그대로 두는 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차선책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