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산골일기(하동 의신마을)

#072.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발(足)’에서 ‘말(言)’로.

풀꽃처럼 2025. 2. 12. 09:10

젊어서는 신체의 건강상태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 부족함이 없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방금 구입한 차량처럼 관리를 하지 않아도 모든 부속품이 제 역할을 완수했다. 기기를 작동하는 대로 달리기도 서기도 회전하기도 완벽했다. 자동차의 상태와 관련 없이 움직이는 데로 자동차는 따라왔다. 연식이 지날수록 외관은 하나 둘 흠집이 생기고 부속품도 교체해야 한다. 점점 부품을 갈아 끼우는 기간이 단축되고, 비싼 부품을 갈아도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대신 차와 나의 교감이 형성되어 차를 몰 때는 한 몸처럼 서로 맞춰가며 작동한다.
 
이제 걷거나 뛰다 보면 무릎과 심장에 이상이 감지된다. 무릎이 아프면서 이전보다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거나 피로도가 빨리 쌓인다. 오래 걷지 못하도록 대뇌가 저항한다. 대뇌에서 내 보내는 전기신호로 수행자인 호르몬은 계속 운동하려는 내 몸과 논쟁한다. 오르막을 걸을 때는 심장이 이전보다 좋지 않음을 미세하게  느낀다. 몸도 자동차처럼 연식이 늘어나면서 하나 둘 삐걱 거린다. 헬스클럽 러닝머신에서 달리는 것도 속도와 지구력이 예전 같지 못함을 느낀다.
 
6개월마다 안과에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녹내장, 백내장 진행상태를 체크하고 다시 6개월 뒤 예약을 잡는다. 술과 담배는 하지 않지만 간수치가 높아져 우루사 약을 처방받아 아침저녁으로 먹는다. 맹장은 대학교 1학년때 떨어져 나갔다. 담낭은 21년 12월에 전신마취로 떼어냈다.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전립선도 좋지 않아 얼마 전에는 비뇨기과에 들러 전립선 염증 처분도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약을 두 가지 한꺼번에 복용한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1900년대 초는 36세, 1970년 62세, 2016년 82세, 2023년 남자 80.6세, 여자 86.4세로 높아졌다. 질병과 위생에 맞선 인간의 노력이다. 한국인의 건강수명은 2020년 OECD  발표기준으로 남성이 69.4세, 여성이 73.4세다. 남성은 평균적으로 길어야 70세까지 건강하고-물론 잔병들로 약을 달고 살겠지만-남은 10년 동안은 멀리 여행을 다니지도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남성은 70세가 되면 시골이나 도시 외곽이 아닌 병세권(병원이 가까운 지역)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의미다.
 
젊어서는 발에 불꽃이 튀도록 구석구석 부지런히 국내외를 여행 다녔다. 이젠 ‘발(足)’에서 'ㅂ'의 뿔(‘ ’)은 시간이 지나면서 닳아 없어졌다. 많은 곳을 둘러보기보다는 뿔이 떨어진 단어인 ‘말(言)’로 어슬렁 거린다. 많은 곳보다는 한 곳에 머물며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한지역을 스토리 중심으로 산책하기도, 카페에 앉아 책을 읽기도, 도서관과 미술관을 다니며 힐링한다. 육체가 쇠하면서 ‘발’이 ‘말’이 되었다.
 
‘발’은 상대방과의 대화보다는 앞을 향해 질주하며 한 군데라도 더 보는데 중점이 있다. 수평선이기 보다는 수직선이다. 둘이 아니어도, 여럿이 아니어도, 혼자서도 가능했다. ‘말’은 그렇지 않다. 수평선이다. 혼자만의 즐거움은 있지만 그래도 ‘말’은 상대와의 교감에 무게추가 기운다. 나이 들수록 여행은 ‘발’보다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필요한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번잡하고 교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끊어버리는 선택을 하고 있다. 사람을 쉽게 사귀기 힘든 나이가 되다 보니 더욱 ‘말’에 공감하는 상대를 만나는 게 쉽지 않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처럼 세상은 엉킨 실타래처럼 혼돈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것이 사람이고 인생이다. 논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악하다고 단명하지 않고, 선하다고 장수하지 않는다. 인생은 그 자체로 모순덩어리다. 인간의 눈으로는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그럴수도 있구나 하고 수긍하고 모순을 수용하는 선택을 하려고 한다.
 
‘발’은 세월이 흐르면서 젊음의 혈기인 뿔이 떨어져 나가 ‘말’로 변화되고 있다. 나이들수록 뇌를 낯선 환경에 의지적으로 던져놓는다. 그래야 뇌가 늙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뇌가 건강해야 생각이 건전하고, 육체도 따라 건강해진다. 이와 반대로, 움직이면 건강해지고 뇌도 건강해진다. ‘발(足)’보다는 ‘말(言)’이 필요한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육체의 노화를 받아들이면서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는 건 더욱 어려운 모순의 상태로 들어섰다는 말이다.

가오슝 도착 다음날 아침 조깅하며 머물고 있는 숙소(85빌딩) 촬영
5km 정도 달린 후 바다건너편 떠오르는 일출을 보다

코로나 시대 이후 첫 해외 나들이는 오랫동안 적어놓았던 대만 가오슝으로 한 달 살이를 나섰다. 한국의 추위를 피해 낮엔 더운 가을날씨의 남쪽으로 이동했다. 공항의 설렘과 현지에서의 막막함으로 낯선 환경에 던져진 뇌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던 영역들을 활발히 가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한국에서도 일상에 적당한 외부 스트레스와 루틴에 따라 지냈던 것처럼 해외에서도 새로운 루틴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어차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은 모순이지만, 통제할 수 있는 루틴은 붙들어야 그나마 인생을 버텨낼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