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산골일기(하동 의신마을)

#087.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심플 라이프

풀꽃처럼 2025. 5. 19. 19:39

주변 지인 중에 전국의 한옥과 정자를 미친 듯이(?)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종택을 지키는 후손과 그 집에 얽힌 과거와 현재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얼마 전부터는 역사를 지탱하는 주인이었지만 기록에는 비껴서 있는 서민집들을 찾아다닌다. 경북 봉화 산골짜기, 안동 등 외지에 있는 고택과 전통 서민가옥을 사진에 남긴다.
 
그의 사진들을 따라 특이한 몇 군데를 들르기도 했다. 괜스레 어디를 가더라도 고택을 둘러보려는 습관이 불쑥 나오곤 한다. 조선시대 내시들이 기거했던 청도 고택과 근현대사의 역사기록에도 남아있던 지배층의 고택을 보기도 했다. <미스터 선샤인>에서 고애신의 집으로 촬영됐던 함양 일두 정영창 고택 대청마루에 앉아 하인들이 어떤 동선으로 움직였을까 하는 모습도 상상하면서.
 
그에게 이황이 말년에 거주했다는 9평 도산서당을 방문해서 담백하게 살았던 모습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고위 관료들이 중앙에서 물러나면서 가식적으로 보이기 위해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했다. 그냥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른 모습일 거라는 말에 뒤통수를 맞았다.
 
도산서당은 일반 서민들이 살았던 초가집이 3~4평 정도인 것에 비하면 3배 크기다. 다른 양반들에 비해선 작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재산은 상당했다고 한다. 《선조수정실록》에는 그가 ‘가난하고 검소함에 구애받지 않고 세상의 명예와 부귀 따위는 뜬구름 보듯이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배층들의 재산규모는 대부분 상당한 규모이기에 이황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는 일반 백성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재산규모를 가졌고, 적극적으로 부를 축적했었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중시했기에 재산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재산을 늘려갔다. 자료에 의하면 이황이 남긴 땅은 약 36만 여평이다. 노비는 250~300여 명을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다른 지주들에 비해서도 규모는 꽤 큰 편이었다.
 
유림의 큰 스승인 이황은 딸이 병 들었을 때 아내가 무당을 불러 굿을 했을 때에도, 딸이 죽은 뒤 100일이 지난 후 다시 굿을 허락했다. 이황은 점쟁이의 괘에 따라 입양을 결정할 정도로 성리학의 거두이면서도 모순스런 지배층의 허상을 드러냈다.
 
이황은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키면 자식은 노비가 되기에 이를 적극 활용했다. 노비가 늘면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산할 수 있는 토지로 전환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대 철학자들이나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이 노동을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노예와 노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역사는 이들이 적은 기록들이다. 다산 정약용 조차도 아들들에게 서울 생활을 고수하고 서울에서 10리 밖으로 벗어나선 안된다고 당부했다.
 
지금의 상황도 그리 변함은 없다. 인구의 50%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있고,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2023년 말 기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의하면 수도권 인구는 2천600여만 명으로 전체 과반인구를 넘어선 50.7%다. 수출 비중은 2022년 기준 72.3%에 달한다. 수도권 가구의 평균자산은 2023년 3월 말 기준 6억 6천만 원으로 비수도권 가구 4억 원 보다 65%가 많다.
 
경실련 자료에 의하면 22대 국회의원 평균재산은 1인당 33억으로 국민 평균의 7.6배다. 부동산은 18.9억으로 4.5배, 증권은 8.6억으로 9.7배다. 이들이 입법하는 법안들이 서민친화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착각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었던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이 2025년 5월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010~2015년 재임기간 동안 검소하게 생활했고, 서민친화적 정책들을 시행했다. 임기 말에도 70%에 달하는 지지율을 유지할 정도였다.
 
그에 의하면 가난한 자는 “무엇을 더 원하는 사람을 말한다... 왜냐하면 끝없는 경쟁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라면 절대적 빈곤에 있는 사람이나 평균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나 가난한 건 동일한 뜻이리라. 법정스님은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고 정의했다. 집의 크기가 점점 커질수록 여유공간이 늘어나는 것보다 물건들로 채워지는 모순에 직면한다. 크기와 상관없이 집은 언제나 좁아 보인다.
 
사람의 마음 상태는 집 안에 놓인 물건들을 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집 안 곳곳에 몇 년째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건, 보이지 않는 마음도 그러하리라 추측할 수 있다. 산골에선 10평도 채 안 되는 곳에 기거하다 보니 불필요한 물건을 들일 공간이 없기에 자연히 담백하게 살아야 한다. 도시의 집엔 몇 년째 방치된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구석구석 놓여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는 가난한 농부가 땅이 점점 커지는 과정에서 더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 땅을 넓혀가는 줄거리다. 넓은 땅으로 안정적인 삶이 가능하게 되어도 타오르는 욕망은 어쩔 수 없었다. 유목민들에게 하루 걸은 만큼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조건에 그는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몸을 혹사시켜 가며 큰 땅을 차지했지만, 과로로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는다. 그가 차지한 땅은 2미터 정도로 시신이 들어갈 만큼의 크기였다.
 
주님께 두 가지 간청을 드리니,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잠 30:7~9 새번역)
 
너무 많은 것을 가지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확률이 높은 게 인간이다. 부정부패는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이다. 자기가 최고인 줄 안다.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인간의 건강수명은 길어야 75세 정도다. 가난한 것도 구차하지만 부유한 것도 위험하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만큼의 상황이 되고 보니 자신의 내면을 비춰보는 장점이 있다.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을 때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내면을 볼 수 없었다. 이제는 내면을 보는 시간이 훨씬 많다. 신 앞에서 스스로가 얼마나 왜소하고 교만했던 흙덩이였는지.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는 딱 그만큼이다.

콘크리트 틈새의 들풀일지라도 사람에게 밝은 웃음을 선물한다

그동안 가지기 위해 애썼다면, 앞으로는 손에서 놓는 훈련을 하고 싶다. 받기보다는 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먼저 가기보다는 양보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담박(淡泊)하게 살고 싶다. 거주 공간을 넓히기보다는 주어진 공간에서 불필요한 것을 치워버리면 넓어진다. 그렇게 단순하게 살고 싶다. 길가에 피어난 이름 모를 들풀도 사람에게 미소를 선사하는 걸 보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산골의 일상이다.
 
 
 
 
* 참고문헌
1. 유성운. 2018년 9월 16일. [유성운의 역사정치] “부귀를 경계하라”던 퇴계 이황은 어떻게 재산을 늘렸나. 중앙일보. www.joongang.co.kr
2. 고득관. 2024년 2월 14일. 이러다 정말 서울공화국···전국 인구 50만명 줄 때 수도권은 8만명 늘어. 매일경제. www.mk.co.kr
3. 톨스토이. 『톨스토이 단편선 1』. 권희정(역). 인디북, 2005
4. 이상각. 『조선팔천』. 서해문집,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