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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인생문답> : 100년을 먼저 산 인생 선배의 삶 나눔

독서

by 풀꽃처럼 2022. 3. 3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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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을 먼저 산 인생 경험자의 삶의 나눔에 관한 책이다. 여러 곳의 에세이에 흩어진 내용들도 중복되어 나온지만, 먼저 살아봤던 인생의 길이기에 읽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삶을 오래 살았다는건 유전적 요인도 있겠지만, 자기 관리를 그만큼 철저히 했기에 가능했으리라.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서 너무 병약해 건강을 일찍부터 관리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누구나 겪었을 어려운 시절을 겪었지만 스트레스 충격을 완화하며 살았던 문장들이 보인다.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나를 위해 살지말고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을 살기를 권한다.

나의 행복만을 위해 살지 말고, 조각하듯이 상대방의 감정을 아름답게 키우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 말고, 내가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과 우정을 나눠라.


만남이 그렇듯이 누구나 자기를 편안하게 해 줄 상대방을 찾는다. 자기 중심이 될 때 인생은 피곤해 진다. 상대방의 요구가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때 갈등은 일어난다. 그 틈이 해결되지 않고 시간이 축적되면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이 되어 쪼개지고 만다. 내 기준이 아닌 서로를 아름답게 조각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함을 살면서 몸으로 배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건, 내가 지금까지 가져온 인생관, 가치관을 예수님이 가르쳐 준 마음으로 바꿀 수 있으면 기독교인이 되는 거고, 그냥 가지고 살면 기독교인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불교도가 된다는 건, 석가의 교훈이 내 인생관이 되고 가치관이 되어 삶에서 드러나야 한다.


종교인이 된다는 건, 지금까지의 자기 중심 가치관이 변해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의미다. 교회를 다니고, 절을 가지만 여전히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면 다시 점검을 해봐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부요하지만 스스로 가난하게 되었던 예수처럼, 궁중에 화려하게 살았지만 중생을 위해 고행을 했던 석가모니처럼 삶 가운데서 드러나야 한다. 그런점에서 나 역시 무릎이 까이고 삭풍의 고통속에서 인생을 체험하는 학생이다.

예수는 율법에 메인 지도층을 질타했고, 법정 스님은 유언으로 '자신의 몸에서 사리도 수습하지 말라'고 했다. 은허 스님도 '법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데 있지 사리에 구현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교회의 헌금은 미리 준비해서 하는 것이지, 굳이 예배시간에 헌금 주머니를 돌리는 건 여전히 거부감이 든다. 전국 사찰을 가더라도 입구에 사리탑들이 즐비한 것도 그 앞에 복전함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의 성경을 압축하면 '사랑'이고, 불교의 가르침이 '바른 삶' 처럼 사람의 사상을 변혁시켜야 하건만 오늘날의 종교는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시한다. 교회 건물은 크고 화려하게, 불교는 '空'이건만 사찰 입구는 유명 스님의 사리탑을 전시하고, 법당에는 숫자와 규모로 압도하는 불상들이 사람들을 이끄는 선전물처럼 편안하지 못한 정경들이다.

교회가 줄어드는 현상은 기정사실이다. 교회가 줄어든다고 기독교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기독교 정신은 살아있기에 그걸 따라가지 못하는 교회가 버림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교육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기독교 정신이 살고, 교회는 죽는다. 교육 수준이 낮은 사회에 가면 교회는 커지는데, 기독교 정신은 약하다.


유럽엔 교회는 없고, 기독교 정신은 살아있다. 한국에는 교회는 많지만, 기독교 정신은 그만큼 미치지 못한다. 기독교가 이땅에 처음 들어왔을때는 신분제 사회였다. 신분제 사회를 뛰어넘어선 것이 초기 한국 기독교 였다. 열린 마음, 열린 사회가 기독교 공동체에는 있었다.

얼마전까지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독교 정신은 후퇴했다(지금도 그런가?). 개인의 권리가 점점 커지는 사회에서 내면의 사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종교는 쇠퇴하고 말 것이다. 종교는 내면의 사상이지 외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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