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제주올레 20일째 8코스, '비뚤어진 존재'들이 모여 사는 가족들에게...

올레길

by 풀꽃처럼 2021. 5. 21. 18:06

본문

2021. 5. 21(금)
8코스 19.6km 월평마을 ~ 대포포구~ 중문 주상절리 ~ 베릿네 오름 ~ 논짓물 ~ 대평포구

8코스 출발점

요즘 제주는 이른 장마처럼 날씨가 삐뚤빼뚤하다. 며칠간 맑았다간 비가 오곤해서 꾸준한 걷기가 쉽지 않다. 어제 하루 휴식을 취하고 오늘 가벼운 발걸음으로 올레구간 중, 긴 거리에 속하는 19.6km의 8코스 길 위에 선다.

한국관광공사의 '2020 걷기여행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제주올레가 걷기여행 중 24.9%로 가장 비중이 높았고, 부산 갈맷길이 8.8%, 한라산 둘레길이 8.1%, 남파랑길이 7.2%를 차지했다. 여전히 둘레길의 원조인 제주올레가 인기 있는 장소로 선호되고 있다. 걷기여행에 참여하는 이유로는 자연과의 교감(64.1%), 신체건강 증진(63.4%), 스트레스 해소(56.2%) 순으로 나타났다.

제주올레의 자료에 따르면, 제주올레의 도보경험자는 제주의 해안과 자연을 느끼며,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소박한 마을 길을 걸으며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등 도보여행의 장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대포해안의 기이한 현무암 군상
버스 차장을 통해 바라본 구름, 하늘에 덧칠한 수채화 같다.
비개인 다음날 흰구름이 하늘을 박박 닦은 흔적

대포해안의 기이한 현무암 군상은 영화 혹성탈출에 나오는 기묘한 바위들 처럼 기괴하게 퍼져있다. 제주 탄생의 순간이 뜨겁게 분출되던 용암이 굳어버린 순간 포착처럼 경이로운 장면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원형이 제주 전해안에 남아있다는 건 걷기 여행자의 축복이다.

민들레 홀씨 독립 직전
수국의 계절
화려한 수국

5월은 가정의 달이자, 5월 21일 오늘은 부부의 날이다. 민들레 홀씨가 꽃의 운명을 다하고, 홀씨 독립을 하기 위해 폭죽을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다. 또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이 땅의 부모, 특히 대부분의 모성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긍휼이 듬뿍 묻어난다.

중문 인근 주상절리
열리 해안도로 주상절리

중문에 군집해 있는 주상절리는 국내 최대규모를 자랑한다. 4~6각형 형태로 조각칼로 인위적으로 깍아낸 것처럼 기학학적 모형을 하고 있다. 물론 입장료를 내고 최대의 주상절리를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 주변에 걸쳐있는 주상절리를 무료로, 그것도 직접 가까이 다가가서 만져 볼 수 있는 주상절리도 있다는 걸 기억하자. 중문의 주상절리는 멀리서 감상해야 하는 아쉬움이 있는 반면, 도보 해안길은 바로 눈 앞에서 현미경처럼 기포 하나하나까지 관찰 가능하다. 굳이 입장료를 내고 보는 것보단 인근의 주상절리를 직접 관찰하는 것이 값진 경험이리라.

베릿내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중문
베릿내오름 정상에서 조망한 한라산 정상

오늘도 어김 없이 오름 하나를 올랐다. 수많은 계단을 지나야 정상에 설 수 있다. 정상에서 조망하는 경치는 오르는 수고를 차감하고도 이익이 남는 장사다.

열리해안도로의 논짓물

논짓물은 용천수인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 천연적으로 형성된 해수욕장이다. 용천수의 양이 너무 많아, 물을 그냥 버린다는 의미로 '논짓물'이라 한다. 수심이 얕아 아이들과 같이 보내기엔 최적의 장소다. 논짓물 옆에는 남탕과 여탕도 따로 있으니, 더운 여름 수박 한 입 크게 베어물면 신선조차 부러운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열리해안도로의 책카페

규모가 크지 않은 작은 카페의 한 켠을 책으로 가득 채웠다. 책은 읽지 않고 보기만 해도 흐뭇하게 만든다. 새책은 최근의 경향을, 헌책은 세월의 흔적과 오랜된 책장의 냄새로 사람을 푸근하게 한다. 카페 한 켠엔 고양이를 위한 거처도 마련한 것을 보면, 주인은 최소한 고양이에게 공감을 가진 사람이리라. 고양이를 사진에 담을려고 했지만, 심한 경계심으로 화면에서 사라져 버렸다. 한적한 곳에 책카페를 열면 백퍼센트 망할 걸 알면서도, 한켠에 씁쓸하게 떠오르는 희망사항이란...노마드 삶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더 크지만...

열리해안도로의 작은 천지
제주 속의 제주. 멀리 좌측부터 마라도, 가파도, 송악산이 보인다

오늘은 장장 19.6km를 걸었는데 별 피곤한 감이 없다. 그리 높지 않은 오름과 평탄한 해안도로, 주상절리를 천천히 감상하며 즐긴 하루였다. 물론 비 덕분에 하루 휴식했다는 것과 올레길 20일째가 되니, 다리 근육이 이제야 적응을 하는 것 같다. 더 걸을 수 있지만, 내일 걸음을 위해 버스로 2시간 걸리는 귀가길에 올랐다.


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배우자 역시 타인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인이다.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에게는 마음껏 기댄다.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불만도 모두 기대에서 시작된다.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면 좋겠는데,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 것이 원인이다. 남편이든 아내든 상대에게 기대하지 말고, 자신에게 하면 될 일이다. 기대를 걸기 때문에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괜히 스트레스를 느끼게 된다. 기대를 안 했는데 선물을 받으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기쁨이 더하다. 기대했는데 그에 답해주지 않는 것만큼 화가 나는 일도 없다.

시모주 아키코, <가족이라는 병> 中


부당하고 억울한 상황 속에서 “아! 그래요?”라고 말함으로써 상대방이 던진 투사의 덫에 걸려들지 않고 적당한 경계를 유지하며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기술을 체득할 수 있도록 하자. 우리의 가족 안에서 발생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 원망, 하소연, 비아냥거림, 시비걸기 등 부정적 감정의 폭발을 마주하는 순간에 “아! 그래요?”라고 말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가족이 나를 아프게 한 것을 말하라면 나는 밤새 얘기해도 다 못할 것이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자. 감사해야 할 일은 어떤가? 그 역시 밤새 얘기해도 다 못할 것이다.

최광현, <가족의 발견> 中

오늘은 가정의 달을 마무리하는 부부의 날이다. 자녀와 부모간은 1촌이고, 부부간은 0촌이다. 그런데 자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반면, 부부는 돌아서면 남이 되는 관계의 아이러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해선 대부분 끝없는 긍휼의 마음을 품지만, 부부간에는 기대라는 덫에 걸려 남이 되거나 남처럼 지내는 관계가 얼마나 많은가.

부부간에도 긍휼하는 마음이 있다면 좋겠지만, 왠지 혼자 손해본다는 생각이 앞서기에 기대감에 미치지 못하면 영영 남이 되어 버리고 만다. 사람은 모두가 '비뚤어진 존재'다. 예외는 없다. 비뚤어진 존재이기에 외양간은 소를 잃어 버렸을때 고치는게 인간이다. 이 땅의 모든 비뚤어진 인간들이 긍휼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면, "아! 그래요?"라며 공감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부부의 날인 오늘 더 좋은 날이 되지 않을까...이 땅의 모든 비뚤어진 존재들이 모여 사는 가족들에게, 긍휼하는 마음이 깃들기를...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