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제주올레 21일째 9코스, 유격코스를 짧고 굵은 땀으로 채우다

올레길

by 풀꽃처럼 2021. 5. 22. 19:35

본문

2021. 5. 22(토)
9코스 6km 대평포구 ~ 월라봉 전망대 ~ 진모루 동산 ~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

9코스 출발점 대평포구

슬로우 푸드(slow food), 슬로우 시티(slow city)처럼 제주 올레는 슬로우 투어리즘(slow tourism)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슬로우 투어리즘이란 바쁘고 빠른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걷기에 최적화 된 인간 본연의 삶으로의 회귀를 제공하는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장시간 걷는다는 건 각종 인간 문명의 산물인 스마트 폰, TV, 자동차 등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자신의 몸에 오롯이 집중함을 의미한다. 몸은 길을 걷고 있지만 뇌는 마음의 길을 걸으며, 내면의 자아와 대화를 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함께 걷는 것도 좋지만, 슬로우 투어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홀로 걷는 것이 효과가 높다. 휴식 시간에 고양이처럼 잠을 잘 수도 있지만,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은 겉으로 보기엔 걷는 행위를 하지만, 실제론 사색이란 보이지 않는 형체가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길을 탐구하는 여정이다.

9코스는 10-1코스인 가파도의 4km 다음으로 가장 짧은 구간이다. 거리상으로는 6km로 짧은 구간이지만, 올레구간 중 가장 힘겨운 유격코스라 할 만 하다. 깍아지른 절벽을 좁은 길을 통해 올라간 후, 다시 월라봉을 올라야 한다. 시간은 짧지만 땀을 단단히 흘릴 각오를 해야한다.

오늘 올라야 할 월라봉 인접한 절벽
물론 절벽을 타고 오르는 건 아니다.

가까이 갈수록 깍어지른 수직 절벽이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대평포구에서 조금만 가면 절벽으로 오르는 옆길이 나온다. 고려시대 제주 서부 중산간 지역에서 키우던 말들을 대평포구에서 원나라로 싣고 가기 위해 만들었던, 말이 다니던 좁고 약간 가파른 '몰질'을 통해 올라가야 한다. 숨이 차오를 정도로 오르다 보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가파른 정상에 서면 너른 평원이 나온다.

2020년 11월 이전까지 올레 9코스 길이는 7.5km였다. 그러나 2020년 11월 절벽의 가장자리를 걸어가면서 빼어난 경치를 볼 수 있었던 '박수기정 길'이 폐쇄되면서 1.5km가 줄어 지금은 6km로 운영되고 있다. 사유지를 열어주는 고마운 분이 있는 반면, 여러가지 사정으로 아름다운 길을 폐쇄하는 경우도 있어 올레꾼으로선 아쉽기만 하다.

소와 말을 만나면 조심하란 울타리 경고문

9코스는 소를 방목하는 코스로, 말을 방목하고 있는 14-1코스와 함께 경고문이 붙은 울타리를 통과해야 한다. 울타리는 말이나 소가 드나들 수 없는 구조지만, 사람은 'ㄷ'자 형태로 통과할 수 있게 되어있다. 울타리를 통과하는 과정은 사파리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호랑이나 사자는 아닐지라도 말과 소가 자연 방목되고 있으므로 약간 긴장이 된다. 몇 해전 9코스를 지나면서 다자란 뿔달린 소가 너무 가까이 접근해 올 땐 약간 두려움이 있기도 했다. 말이 주는 위압감 보다는 뿔달린 소가 더 위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오늘은 방목된 소들이 보이지 않고, 곳곳에 그들의 흘린 배설물에만 주의해야만 했다.

산방산이 멀지 않게 보인다

산방(山房)이란 말은 굴이 있는 산을 뜻한다고 한다.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과 산방산은 생성과정이나 시기가 다르나, 한라산 정상의 분화구와 산방산의 둘레가 같다고 한다. 전해져 오는 얘기로는 무슨 연유로 옥황상제가 화가 나서 홧김에 한라산 정상의 바위 산을 뽑아 던졌는데, 그 뽑힌 자리가 백록담이고, 뽑아던진 암봉이 산방산이었다고 한다(위키백과 참고). 백록담의 둘레와 삼방산의 둘레가 같은 이유에 대한 절묘한 이야기다.

2차 대전 말기 일본군 동굴 진지들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일본 제국주의는 제주도를 일본 본토를 지키는 결사항전의 군사기지로 삼았다.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이곳 월라봉에 총 7개의 동굴을 팠다. 9코스에선 4개를 볼 수 있었다. 2코스 성산일출봉, 19코스 함덕해수욕장 인접한 서우봉 등 전망이 뛰어난 곳은 이처럼 일본 제국주의의 아픈 역사 흔적을 마주쳐야 한다는게 착잡한 마음이 든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오지 중의 오지였고, 유배 등급도 가장 높은 등급의 유배자들이 왔던 제주도. 일본 제국주의의 중일 전쟁을 치르기 위해 비행장으로 활용되었던 제주도. 4.3사건의 상흔과 6.25 민간인 학살사건이 일어났던 제주도. 교통이 발달하고 국민소득이 향상되면서 최고의 휴가지로 각광받는 것은 최근이 일이다.

올레길을 걷기 전과 걷고 난 후의 제주도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진짜 제주도를 볼 수 있다.

하귤 밭

제주도 여름귤이기도 하면서, 5월의 귤인 하귤은 한 때는 '줘도 안 먹는 귤'이었다. 껍질이 두껍고 단단해 까기도 어렵고, 씨가 많고, 게다가 시큼한 맛 때문에 기피하는 과일이었다. 보통 관상용으로 하거나, 깨끗이 씻고 잘라서 설탕에 재여놓고 계피, 생강과 함께 차로 마셨다고 한다. 그런 하귤이 시큼한 맛의 매력에 빠진 사람이 늘면서 점점 인기를 끌자 이처럼 하귤을 재배하는 곳이 늘고 있다고 한다.

안덕계곡은 깊고 울창한 절경을 간직한 계곡이라고 하는데, 바다와 만나는 끝부분이라 그런지 설명과 같은 깊은 계곡이란 느낌은 별로 없다. 계곡을 둘러싼 원시림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를 받는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올레구간과는 비껴서 있다.

2시간 정도되는 짧은 구간이었지만, 체력적으론 어느 구간보다 땀을 많이 흘린 구간이었다. 오늘은 짧고 굵게 유격코스로 체력 단련한 날이었다.


30년전에는 유난히 의지가 굳은 용감한 사람이 개인용 컴퓨터를 사기 위해 돈을 모았다. 지금은 의지가 굳은 사람이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은 고독의 기회를 놓친다.
고독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놓쳤는지조차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고독에도 좋은 고독과 그렇지 못한 고독이 있다. 슬로우 투어에 해당하는 홀로 걷는 고독은 약이 된다.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의지가 굳은 사람들이 스마트 기기를 장만했다면, 지금 그들은 반대로 스마트 기기를 거부한다.

고독은 피하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는 거다. 고독이라는 동굴에 자신을 집어 넣을때, 고독으로 부터 해방할 수 있다. 중세 수도사(수녀 포함)와 고승들도 면벽수행하며 인간해방을 꾀했다. 범인인 나로서는 낮은 단계의 걷기와 기도가 고작이다. 인생은 역설 투성이지만, 그 역설 속에 진리가 숨어 있다. 파도를 이기기 위해선 파도를 마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처럼,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기 보단 고독속으로 한 번쯤 밀고 들어가는 것도 시도해 봄직하지 않은가. 어차피 인간 모두의 끝점은 만인 평등의 죽음인데 뭔들 못하리요.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