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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23일째 10코스, 아름다운 경치와 대조되는 아픈 역사 현장속으로

올레길

by 풀꽃처럼 2021. 5. 2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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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24(월)
10코스 15.6km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 ~ 사계 해안 ~ 송악산 ~ 섯알 오름 ~ 하모 해수욕장 ~ 하모 체육공원

다크 투어리즘이란 전쟁이나 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말한다. 오늘은 송악산까지는 한라산, 산방산, 바다 등 최고의 조망을 누리지만, 이후에는 빼어난 경치와 함께 어두웠던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길이 될 예정이다.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
높이는 42m에 불과하나 엄연한 오름이다

10코스 출발점에서 가까운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을 지나 썩은 다리를 넘어오면 황우치 해안이 연이어 등장하는 아름다운 해안선을 걷는다. 썩은 다리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우리가 아는 의미의 썩은 다리는 아니다. 일종의 언덕정도로 가볍게 이해하면 될 듯하다.

주상절리 벌집 모양의 횡단면
하멜 기념비 언덕에서 바라본 황우치 해안

아름다웠던 황우치 해안도 6.25 당시 이 곳에서 모슬포와 인근 미군 기지에 물자를 수송했었다고 한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만 괴롭히지 않고, 아름다운 자연도 훼손시켜왔다. 지금의 코로나 역시 인간의 욕망 때문이며, 덕분에 자연은 일시적으로 깨끗한 공기를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하멜 표류기의 표착지로 추정되는 사계리 해안의 전시관
하멜 상선 전시관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선박이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표류되어 제주도에 상륙했다고 하는데, 상륙 장소는 분분하지만 현재 기념비와 전시관은 용머리 해안과 가까운 곳에 설치되어 있다.

사계리 해안의 형제섬
사계리 해안
햇살이 바다 표면에 부딪혀 은빛으로 산화한다
산방산 너머로 한라산 정상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송악산
2차 대전 말기 일제가 판 송악산의 진지 동굴들

2차 대전 말기, 일본 제국주의는 1944년 8월 괌 함락, 10월 필리핀이 함락되자 패전이 직감했음을 알았다. 그들은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홋카이도와 제주도를 미국의 가장 유력한 상륙지점으로 판단했다. 그 중에서도 제주도의 비중이 높았고, 1945년 1월 1천명을 넘지 않았던 제주도의 일본군이 8월엔 7만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한반도에 배치된 전체 일본군 36만명과 비교하면 20%에 이르는 수치다.

연합군은 1945년 9월을 제주 상륙 시점으로 잡았는데, 8월 일제가 패전 선언을 하지 않았다면 제주도의 피해가 상당히 컸으리라 예상한다.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 1만 5천명, 일제군 6만 5천명, 민간인은 약 12만명이 전사해 군인보다 많을 정도로 참혹했었다. 게다가 제주도가 옥쇄를 각오한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으니, 그 피해는 어마어마 했을 것이다.

송악산과 성산 일출봉 등 곳곳에 인공 동굴을 팠던 일제는, 하늘에는 가미가제라는 자살 특공대가 바다에는 가이텐이라는 인간어뢰 자살 특공대가 머물렀던 흔적들이다.

현재까지도 일제의 군사시설 숫자를 정확히 파악 못할 정도이며, 제주올레 2코스의 성산 일출봉, 10코스 송악산, 19코스 함덕의 서우봉, 18코스 사라봉 등이 있다.

구름만이 한라산, 산방산, 바다 임을 구분한다
송악산에서 보이는 가파도와 국토 최남단의 마라도
송악산 해변

송악산 산책로는 가파르지도 않으면서, 뒤로는 한라산과 산방산을 볼 수 있고, 앞으로는 가파도와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다. 해안절벽은 오래된 지층들이 층층이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주상절리처럼 거대한 기둥들이 군데군데 무너져 붉은 흙이 드러난 곳이 있는가 하면, 이 모든 것을 감싸안은 검푸른 바다가 산책길 내내 동행한다. 송악산 정상 부근은 말 목장이 있어 제주도 스러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산책로가 아닌가 생각한다.

송악산 해안에선 마라도행 직행 선박이 있으니,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다녀와도 무방할 듯 하다. 아름다운 섬 제주에서 국토 최남단 마라도 표지석을 본다는 건 귀한 경험이다. 동해안의 DMZ 내의 고성, 동해 독도, 서해 백령도는 왠만해선 가기 힘든 장소지만, 마라도는 잠깐 마음만 먹으면 30분 내외면 갈 수 있는 가까우면서도 의미가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섯알 오름 민간인 희생자 터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45년 미군정에 이해 폐지된 예비검속법을 악용해 252명을 법적인 절차없이 무고한 양민들을 집단 학살한 현장이다. 당시 모슬포 해병대 중대장은 하사관들에게 "한 사람이 한 명씩 총살하라"고 명령했고, 지휘관이 보는 앞에서 한 명씩 총살해 호안으로 떨어지게 했다.

연령별 희생자로는 20세 이하 33명, 20대 122명, 30대 52명 등 20~30대 한창 젊은 사람들 207명을 총살함으로써 전체 252명중 80% 이상이 젊은이들이었다.

셋알 오름의 일제 고사포 진지
알뜨로 비행장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알뜨르는 '아래쪽에 있는 드르'란 말로 모슬포 마을보다 낮은 지대에 위치한 들판을 말한다. 1926년부터 지어진 알뜨르 비행장은 1930년 중반까지 20만평 규모로 지어졌다.

일제와 미국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일제는 대한제국을 지배한다는 각서를 체결했다. 같은 해 11월 일제는 을사조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1910년 식민지로 병합했다.

나아가 일제는 중국 대륙에 진출코자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설립해, 일제 관동군이 통치를 주도했다. 이후 중국 대륙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위해 1937년 베이징 인근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자작극으로 발포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이 전면적으로 시작된다.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이 곳 알뜨르 비행장에서 출격한 폭격기가 서해를 건너 상하이까지 날아간 장소다. 이 후 중일전쟁이 거세지고, 일제가 미국의 점령지인 필리핀을 탈취하면서 전장은 확대되었고, 알뜨르 비행장은 지금의 여의도 면적인 80만평에 이를 정도로 확장했던 가슴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동아시아를 둘러싼 고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 당, 왜의 5국간의 패권은,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조선, 명, 왜라는 3국간의 패권으로, 20세기초 대한제국, 청, 일본 3국간의 패권로 이어졌다. 현재 그 패권은 한국, 중국, 일본, 미국으로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

역사는 과거이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현재이며, 미래다. 여전히 한국의 선택지는 좁지만, 지금은 미국이 한국의 목을 비틀어 쥔 형국이다. 휴전협정의 당사자는 북한, 중국, 연합국(실질적으론 미국)이기에 한국이 자주적으로 동아시아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G2가 되어버린 중국, 언제나 어깃장만 놓는 일본, 중국을 고립시켜 영원한 경찰국가로 남을려는 미국의 관계에서 차선책은 무엇일까.

고대로부터 풀리지 않는 열쇠는 누가 풀 수 있을까. 매번 미국에 불려가는 듯한 모습처럼 보이는 한국은, G2 사이에서 명분대신 실리를 택했다가 인조반정으로 실각해 유배지 제주도에서 쓸쓸히 죽어갔던 광해군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하모 해수욕장

오늘 올레길 10코스는 초반에는 제주의 아름다운 해안과 한라산을 보았다면, 중반에는 소위 다크 투어리즘으로 아픈 현장을 목격했고, 종반에는 다시 제주도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풍광으로 마무리 한다. 하모 해수욕장 뒤로 운진항에서 가파도와 마라도행 여객선의 무심함을 보면서 하루하루 평범한 시간으로 되돌아 오는 인간의 간악함을 목격한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악의 평범성’을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악의 평범성 개념의 핵심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데 있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못하는 것이 아이히만에게서 보이는 악의 모습이다.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터무니없이 멍청했다.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동아시아의 자국 패권주의 역사를 보면서, 또한 나역시 그 회오리의 현장에 있으면서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힘이 너무도 빈약함을 본다. 개인적 차원이든 조직적 차원이든 국가적 차원이든 먼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동아시아를 떠나서 타인과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도 한나 아렌트의 말들은 곱씹어야 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게 만들었던 아이히만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다. 현재이며 미래일 수 있다. 한나 아렌트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인터뷰 책이므로 아주 쉽게 그녀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기에 일독을 권할 만하다.

* 참고문헌 : 이영권(2008), 제주역사 기행,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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