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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24일째 11코스, 여행지에서 평소처럼 생활하는 것이 진짜 여행이다

올레길

by 풀꽃처럼 2021. 5. 2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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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25(화)
11코스 17.3km 하모체육공원 ~ 모슬봉 ~ 정난주 마리아 성지 ~ 신평 곶자왈 ~ 무릉외갓집

오늘 코스를 걸으면 12, 13 두 코스만 남는다. 어디에 가든 현지에서처럼 생활할려는 자세로 움직인다. 마음만 결정되면 후다닥 짐싸서 원하는 곳으로 향한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 일본 애니메이션 도라에몽의 '어디에든 문(どこでもドア, 도코데모 도아)처럼 여행은 여기서의 생활이 연장되는 것으로 되었다(도라에몽은 보지 않는다).

과거에는 현지에서 머물 동안 시간대별 동선과 볼 것, 탈 것, 살 것을 꼼꼼하게 계획했다. 현지에서 머무르는 기간보다 더 긴 자료를 검색하고 준비했다. 언제부턴가 그런 조사는 거의 하지 않는다. 지금 머무는 곳의 생활 패턴대로 그대로 지낼려 한다. '어디에든 문'처럼 휙하고 열어젖히기만 하면 된다.

졔주도 그렇게 훌쩍 넘어왔다. 무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물론 올레길을 걷지만).  그냥 동네 산책하듯 올레길 걷는 걸 제외하면, 하루하루 이전에 있던 곳과 동일한 패턴으로 지낸다. 국외로 확장되더라도 외국어를 사용한다는 점 말고는 지금 살고 있는 것과 동일한 삶을 살 것이다.

황사 때문에 시계가 극히 불량하다
왼쪽은 마늘, 오른쪽은 보리 수확
이번 코스는 온통 마늘 밭들이 이어진다
천주교 순례길의 정난주 마리아 묘 입구
정난주 마리아 묘

정명연(丁命連, 정난주)의 남편은 황사영이다.  황사영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사형을 당했고,  정난주는 제주도에서 37년간의 관노비로 귀양살이 끝에 1838년 숨을 거둔다.  정난주는 다산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이다.  그녀는 온갖 고난속에서도 마마에 걸린 아이들을 보살피고 지역에 구휼소를 세우는 등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이웃의 칭송을 받았다.

신앙이란 모진 고문속에서도 사랑을 전해주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풍요속의 빈곤한 교회처럼 되었지만, 이 땅에 천주교와 기독교가 들어왔던 시기는 사랑으로 넘쳐났었다.  삶이든 신앙이든 연꽃처럼 진흙속에 있을때 강한 향을 풍긴다.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되는 것처럼.

개망초. 모양 때문에 계란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꿀풀. 꿀을 다량 함량해 꿀벌의 기호 식품(?)

곶자왈이란 나무와 숲이 마구 엉클어진 곳의 제주말로 울퉁불퉁 다니기 험한 숲이다. 열대와 한대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숲이라 한다.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는 비자림도 곶자왈이다.

곶자왈은 과거에는 제주민의 삶의 터전이었다. 숯가마터, 방목장 등으로 활용되었다.  곶자왈 곳곳에 지금도 삶의 터전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은 숲의 바다에서 요정이 나올 것 같은 밀림을 지나온 느낌이다.

곶자왈을 빠져 나오면, 수령 300년 가량의 팽나무 두 그루가 연못에 운치있게 자리잡고 있어 평화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어제 무거웠던 제주의 다크 투어를 털어 버리듯 숲 속에 마음의 짐들을 내려두고 나왔다.


필요한 건 외국어 능력도 아니고 정보도 아니고 연줄도 아니고 돈도 아닌, 바로 '나'였다.  별 볼 일 없는 나, 한심한 나, 지구 끝까지 간다고 그런 내가 완전히 달라질 리 없다.  평소에 하지 않던 것을, 여행을 갔다고 해서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평소에 하던 걸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다.
이나가키 에미코, <인생에는 특별한 것과 평범한 것이 모두 필요하다>

2017년 국내에 <퇴사하겠습니다>로 퇴준생 열풍을 가져왔던 전직 아사히 신문 기자.  1965년생의 저자가 직장에서 30년 가량 생활하다가 2016년 1월 회사를 툭 내려놓았다.  동일본 지진을 보면서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기구 없이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고 있다.  이 후 몇 권의 책을 내 놓았고, 올해  2월 이 책이 나왔다.  원제는 <人生はどこでもドア リヨンの14日間>이다.  한글로 번역하면 <인생은 어디에도 문, 리옹의 14일간>처럼 그녀가 프랑스 리옹에서 에어앤비를 통해 숙소를 정하고 14일간 체류한 여행기다.  한글 책 제목은 무얼 말하는 건지 모호하다.

지극히 빈약한 영어와 전무한 프랑스어지만 현지 시장에서 매일 식재료를 구하고, 근처 카페에서 글쓰고, 부근을 산책하는 14일간의 헛헛한 일상들이다.  일본인은 아주 사소한 일로도 이렇게 가볍게 책을 낸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57세의 비혼 여성이 혼자서 프랑스 리옹으로 건너가 좌충우돌 하는 모습은 이 땅의 중년 여성과 흡사하게 닮은 장면들이 나온다.  일본인 특유의 타인을 지극히 배려하는 점을 제외하면, 외국어 두려움과 홀로 여행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중년의 한국인에게도 간접 경험은 될 듯하다.

도라에몽에 나오는 '어디에든 문'처럼 세상은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도, 혼자서 훌쩍 떠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코로나란 복병이 독감 정도로 백신의 펀치를 맞는 시기가 온다면, 저자처럼 일본이든 프랑스 리옹이든 '평소의 생활'을 한다는 생각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난 체코에 몇 개월간 현지인 처럼 머무르고 싶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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