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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평사리에 그려진 발자국들

일기/산골일기(하동 의신마을)

by 풀꽃처럼 2024. 2. 13.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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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평사리 들판에는 차가운 바람과 고독한 정적만이 충만하다. 강이라고 하면 강폭이 넓고 백사장은 좁은 것이 특징이다. 하동의 섬진강 평사리는 모래사장이 주인이고 강물은 거저 귀퉁이에서 거들뿐이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평사리는 고운 입자의 모래가 넓게 펼쳐져 있는 장소다.


평사리를 이루는 경계선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걷는다. 부드럽게 발바닥을 감싸 안으며 제 몸 안으로 이끄는 평사리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다. 한 발 한 발 모래 속으로 빠져들고 나오기를 반복하며 걷다 보면 절도 명상의 단계로 들어간다. 평사리를 건너 섬진강이 흐르는 물줄기에 가까이 가면 졸졸졸 흐르던 강물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폭을 자랑하며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평사리 들판에 사람은 없지만 많은 사람이 지난 흔적들이 도장처럼 꾹꾹 눌러져 있다. 대부분 두 명이 걸은 흔적이고 혼자 지난 발자국도 보인다. 저마다의 발자국은 저마다의 인생이자 예술이다. 방향 없이 제각각의 흔적들이 한 폭의 추상화처럼 질서 있게 보인다.


마르셀 뒤샹은 개념예술을 표방하며 미술을 해체시켰다. 고대에는 사냥의 흔적을 기록으로 벽화에 남겼다면 역사를 거치면서 그림은 화가의 전유물이 되었다. 중세에는 문자를 읽을 수 없는 계층을 위해 그림을 통해 의도하는 바를 이루려고도 했다. 종교 주제의 그림은 문해력이 없는 계층에게 교리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성경은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계층의 전유물에서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인쇄술의 발명에 힘입어 종교권력을 해체했다. '오직 성경'을 주장하며 개신교가 태어났고, 종교를 주제로 한 그림은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고, 인물화가 널리 퍼지게 된다.

그림은 되도록 사실적으로 그려야 했지만, 사진이 등장하면서 그림은 위기를 맞는다. 보이는데로 그려서는 사진을 따라잡을 수 없자 사물에 느낌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인상주의 그림에서 추상화로 나가갔고, 난해하기 그지없는(?) 현대미술에 이르렀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은 기성품인 변기에 이름을 부여해 출품작으로 전시한다. 변기라는 단어를 잊은 채 우아한 곡선을 감상하는 새로운 개념예술을 표방했다. 이제 예술은 화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앤디 워홀은 자신이 직접 참여하지 않은 채 공장을 통해 대량 생산하는 체제를 도입했다. 중세에도 유명한 화가들의 공방에는 수많은 수련생들이 초기작업을 하고 화가는 마지막에만 붓칠해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곤 했다.

얼마 전 화투 작품으로 사회적 논란이 되었던 조영남 화가도 개념작업은 자신이 작업은 다른 사람이 했다. 누구나 개념만 있다면 예술가가 되는 세상이다. 스마트 폰만 있으면 누구나 방송국이 되는 세상처럼 권력은 해체되어 왔다.

마르셀 뒤샹은 기성품을 통해 예술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도입했다. 여행 역시 우리가 새로운 환경을 보는 것이지만, 기존 있는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본다면 주위가 달라 보이게 된다. 나아가 우리의 인생도 하나하나의 개념예술이다.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챗바퀴가 아니라 순간순간이 모험이자 선택이다. 그 모험과 선택이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을 뿐 각자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예술이 된다.

'혼자 있지 않으려는 마음에는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독을 견딜 수 없는 나약함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줄 알면 사고를 한층 더 깊게 할 수 있어 성장으로 이어진다. 혼자 있는 시간의 장점들을 발판으로 삼을 수 있도록 의식을 바꿔나가자.'  에노모토 히로아키,  고독이라는 무기≫ 중


섬진강 평사리에는 저마다의 발자국이 모여 그림을 이루었다. 한 발 한 발 선택에 의해 개인의 인생이 그려진다. 누구나 소중한 인생이고, 다가오는 삶을 향한 도전이다. 평사리에 물이 차오르면 그림은 지워지고 새로운 흔적들이 점점이 이어진 또 하나의 작품이 될 것이다. 각자의 인생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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