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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매물도, 소매물도(2022. 3. 15) : 旅行이라 쓰고 餘行이라 읽는다

부산에 산다는 건

by 풀꽃처럼 2022. 3. 16.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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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旅行)은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을 말한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모처럼 시간을 내었으니 여행지에서 조차 빡빡하게 움직인다. 쉼이 되어야 할 여행조차 스케줄에 따라 긴박하게 다음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여행은 여행(餘行)이 될 때 삶의 쉼표가 된다. 여행지에서 조차 계획대로 틈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시간은 旅行은 될지언정 餘行은 되지 못한다.

여행은 여행중에 쉼이라는 게으름을 넣을때 완성된다. 맛집도, 멋진 사진찍기도 내려놓고 아날로그 몸뚱아리로 멍때릴때 여행은 진짜 여행이 된다.

부산에서 거제도 저구항까지 갈려면 2시간은 족히 걸린다. 아침 첫 배인 8시 30분을 승선하기 위해 새벽에 나섰다. 요즘 본격적으로 봄이 기승을 부리나 보다. 새벽인데도 그리 어둡지는 않다. 어김없이 계절은 옷을 갈아입는다.

부산~거제간 해저터널을 왕복하면서 1만원이 결제 되었다는 기계음이 거슬린다. 물론 거가대교가 없다면 상당한 거리를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는 그렇지 않다. 보령 해저터널은 더 긴데도 불구하고 무료다. 그 상대적 박탈감이 편리함을 압도한다.

거제도 저도항 매물도행 선착장
저도~매물도~소매물도를 운항하는 여개선
여객선을 따라오며 먹이를 기대하는 갈매기들
한 마리 갈매기의 꿈처럼 깃털에 햇살을 듬뿍 담아냈다

오늘 일정은 저구항~매물도 당금~소매물도로 급변경했다. 원래 계획은 저구항에서 소매물도로 들어가 등대섬 입구에서 물이 갈라지는 현상을 목격할려고 했다. 매표원은 시간이 무한정 남으니 차라리 매물도의 장군봉을 오르고, 11시 30분에 소매물도 들어가 오후 3시 20분 배를 타고 돌아올 것을 추천한다. 현지인의 정보를 듣고, 수긍한다.

계획은 계획일 뿐 계획도 다른 일이 벌어질 때 참다운 여행은 시작된다.

매물도의 당금항

8시 30분 저구항을 출발한 배는 9시 매물도 당금함에 도착했다. '당금같다'는 매우 보래롭고 귀하다는 뜻이다. 당금 마을에 어울리는 말 같다. 옥빛 바다, 동백 군락, 소매물도를 한 눈에 조망하고, 다도해 섬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옥색 바다가 이국적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에 맺혀 있는 동백꽃
길가에 후투툭 떨어진 동백꽃
산책로에도 동백꽃이 깔려 있다.
바위 밑에도 동백꽃이 피었다.

동백은 겨울을 이겨낸 꽃이다. 빨간 동백꽃은 '그 누구보다도 그대를 사랑한다'는 의미다. 동백꽃은 나무에서 필 때도, 땅에 떨어질때도 제 몸으로 온전히 낙하한다. 꽃 잎 한 장 한 장 미련을 남기지 않고, 후투툭 후투툭 땅으로 떨어진다. 땅에서 온전한 제모습을 유지한다. 후투툭이란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이 동백꽃이다.

목련처럼 나무에 달린 채 한 잎이 시들며 추하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목이 잘리는 것처럼 툭하고 미련없이 제 몸을 낙하시킨다. 누구보다도 그대를 사랑했기에, 미련없이 아쉬움없이 한번에 툭하고 제 몸을 떨구어버린다.

한 번에 붉은 꽃이 툭하고 떨어지는 것처럼, 떨어져서도 붉은 빛을 유지하는 대가리처럼, 동백꽃은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1947년 국군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노인과 부녀자, 신생아까지 무차별 죽임을 당했다. 4.3사건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사건이-여수와 순천에서 국군이 토벌군이 되기를 거부한-여순사건이다.

동백꽃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슬픈 역사를 상징하는 그런 복잡한 꽃이 되어 내 맘 속에 혼재한다. 후투툭 후투툭 마음 속에서 사랑이 잘려나간 그런 핏 빛, 동백꽃이다.

매물도에서 부서지는 바다를 본다.
썰물 시간이 다가왔나, 물 속에서 거친 물결이 일렁인다.
매물도 정상 장군봉(해발 210m)
매물도 정상에서 본 소매물도
자라가 긴 목을 뺀 모습처럼 보인다.
소매물도 등대섬의 기이한 바위 군락
거대한 향유고래가 입을 벌리고 먹이사냥을 하는 모습같다.
소매물도 등대섬이 보이는 전망대에서
등대섬에서 조망한 열린 바닷길 1
등대섬에서 조망한 열린 바닷길 2
1917년부터 불을 밝힌 등대
등대에서 바라본 열린 바닷길
망망대해 손가락을 수면위로 밀어올린 섬 들
소매물도 관세역사관에서 바라본 등대섬
매물도 당금항 포구
바다를 가르는 배의 긴 여운

창조성은 여행, 독서, 운동을 통해 활성화된다. 여행은 낯선 곳에 몸뚱아리가 놓일때 뇌는 새롭게 가동된다. 집에선 눈감고도 습관적으로 할 수 있어 뇌는 철저히 게으름을 피운다.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쓰면서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뇌의 역할이다. 생존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여행은 습관에 안주하는 뇌를 가동하는 격발 장치다. 녹슬은 뇌속의 연결망에 자극을 주는 알약이다. 독서 역시 책을 읽으면서 타인의 생각을 훔치며, 뇌의 가소성에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다. 운동은 몸을 움직여 뇌가 실시간 환경에 반응하게 한다.

디지털은 뇌만 자극하지만, 아날로그는 몸도 자극합니다. 디지털 문명 세례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현대인의 뇌는 지나치게 많은 자극을 받는 반면 몸을 쓰고 반응하는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몸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뇌가 그것을 해석하고 결정하면, 다시 몸이 세상에 적용하는 일상적 경험을 우리는 회복해야합니다.
정재승, <열두 발자국> 중

이번 여행에 동반했던 책이다. 정재승은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다. 그의 책은 쉽게 읽히면서 인사이트를 준다. 잠잘려는 뇌를 때려 깨운다. 뇌와 몸이 선순환하는 사이클에 여행은 좋은 자극제다. 旅行이 아닌 餘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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