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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리딩 - 출애굽기 31~35장 (17일째) :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체

바이블 리딩

by 풀꽃처럼 2022. 1. 28.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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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아론과 공모해 금송아지를 만든다.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체로 나타내기를 원했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흥청거리며 뛰논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이 이집트에 끔찍한 재앙을 내렸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보호했던 은혜를 체험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넜지만, 이집트 군대는 몰살한 것을 목격했다. 광야에선 매일 신령한 만나를 먹었다. 주님의 전능하심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은혜를 온 몸으로 체험한 그들이 얼마나 우매한 사람들인지 그들을 한탄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내 모습과 같다.

 

죄에서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을 땐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러나, 여전히 삶이 불안할 땐 초조해 한다. 원하는 대로 삶이 나아가지 않고 꼬일때 답답해 한다. 그럴 때 누군가 내 앞날에 대해 토정비결처럼 확실하게 얘기해주면 안심하곤 한다. 눈에 구체적으로 뭔가 보여야 안심하는 죄성은 여전히 그대로 내 속에서 불끈불끈 마그마처럼 솟아오른다. 

 

모세도 주님의 계획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다(33:13). 주님은 함께 하겠다고만 응답한다(33:14). 우리도 주님께 앞날을 알려달라고 기도하지만 거의 대부분 알려주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앞날을 알 수 없어 답답한 인간과 주님이 함께 한다는데 뭐가 걱정이냐며 안타까워하는 주님과의 간격이다. 항상 함께 하겠다고 하는 주님 보다는, 눈에 확실한 계획을 알려하는 인간과의 그 간격은 믿음으로 채워야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다(롬 10:17). 

 

금송아지 숭배 사건으로 주님은 모세에게 그들이 타락했다며 없애버리겠다고 말한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끌어낸 백성을 죽이지 말라며, 진노를 거두길 중보한다(32:11~13). 주님은 재앙을 거둔다. 

<황금송아지 숭배>, 니콜라 푸생, 런던 국립 미술관

모세는 주님의 증거판을 들고 이스라엘 거처에 내려와선 금송아지 주위에서 춤추는 그들을 보곤 돌판을 던져 깨뜨려 버린다. 모세는 자원한 레위 자손에게 백성를 죽이라고 하니 3천명 정도가 죽임을 당한다. 레위는 한 때 세겜에서 잔인한 살인을 저질렀고(창 34:25), 야곱은 임종시 그를 저주했다(창 49:5~7). 레위 자손이 주님의 편에 서서 행했던 일은 야곱의 저주로부터 회복됨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레위는 더이상 사사로이 행하지 않고, 주님의 대의명분을 위해 행동했다. 모세는 죽기 전에 레위를 제사장직으로 축복한다(신 33:9~11).

 

모세는 우상숭배로 인해 주님께 백성의 죄를 중보하며, 자신의 이름을 주님의 책에서 지워달라고 간청(32:32)한다.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찌질한(?) 모습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모세가 중보자로 섬기는 모습은 가장 위대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억나게 한다. 모세는 백성의 죄를 위해서 죽을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럴 수 있고, 그렇게 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오른쪽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있다(롬 8:34).

 

모세는 마지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했고(33:11)와 주님 얼굴을 보는 자는 살 수 없다(33:20)고 말해 모순이 아닐까. 그리고, 아론 등과 70여 장로들도 주님을 보며 먹고 마셨다(24:11)처럼 얼핏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모세가 주님과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했다는 내용은 '마치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 그만큼 모세는 주님과 친밀하게 사적인 관계를 누렸다는 의미다. 얍복강의 야곱이 주님 얼굴을 직접 보았지만 생명이 보전되었다(창 32:30)는 고백은, 밤중에 뭔가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다.

 

모세는 주님의 계획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지만, 주님은 모세와 함께 가며, 안전하게 하겠다고 답하며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등만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빌립이 주님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자 '나를 본 자는 주님을 보았다'고 답한다(요 14:8~9).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않을 것이란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아기 예수를 보곤 주님의 구원을 찬양한다(눅 2:25~28).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보고 싶어했지만 보지 못했고,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했던 예수 그리스도(마 13:17)의 은혜를 지금 우리는 풍족히 누리고 있다.

 

이교도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숭배한다. 주님은 '말씀의 하나님'이다. 모세조차도 얼굴을 보면 살 수 없다. 주님은 주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세도 주님의 영광을 보기 원했지만 등만 겨우 봤다. 요한복음에서 빌립이 주님을 보여달라고 한 그 물음은 현재의 신앙인들 역시 궁금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씀이신 주님이 육체로 세상에 왔다(요 1:1,14).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읽을때 주님을 더욱 더 알아갈 수 있다. '말씀'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히 11:1).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친 체코의 신학자 얀 후스(1372년? ~ 1415년)는 성서를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다 화형에 처해졌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e)'은 기록된 말씀의 권위를 통해 중세교회의 예배의식에 치중하는 것을 비판했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올 때 인간은 살 수 있다.

 

주님은 모세에게 돌판 두 개를 다시 가져오라고 말한다. 이번에는 나무궤도 같이 가지고 시내산으로 나아오라고 한다(신 10:1).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올 때 주님은 "주, 나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고 선포한다(34:6)". 모세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의 악과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주님의 소유로 삼아줄 것을 중보한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다시 언약을 맺으며, 십계명을 돌 판에 기록한다. 

 

출애굽기의 나무궤 안에는 십계명 두 개의 돌판외엔 아무것도 없다. 돌판은 '기록된 말씀'이다. 그 말씀이 지금 우리 손 안에 놓여있다. 읽든지 안 읽든지는 자유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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