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었다. (출 2:22 새번역)
게르솜(Gershom)은 “타국에서 나그네 됨”이라는 뜻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던 아담부터 인류의 역사는 나그네였다. 언젠가는 낙원에 돌아가리라는 꿈으로 성서는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고향을 떠났고, 야곱은 자의 반 타의 반 나그네로 험악하게 굴곡진 삶을 살았다. 모세 역시 왕궁에서 도망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나그네로 유랑하며 살았지만, 내면은 더 단단해졌다.
성경은 나그네의 역사다. 창세기인 세상의 시작부터 낙원에서 퇴출된 아담과 그의 후손 아브라함, 야곱, 형제들에게 왕따 당해 노예로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요셉, 모세, 정착하며 세무직원으로 살고 있던 마태를 나그네로 만든 예수를 거쳐 바울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나그네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다. 나그네가 꿈꾸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닌 본향이기 때문이다. 최초 인간이 퇴출된 창세기에서 다시 본향을 꿈꾸며 돌아가는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나그네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나그네는 정착하지 않는다. 이 땅에 나그네의 소유는 없다. 그저 살아가는 동안 잠시 사용하는 것뿐이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관조적 어조를 지닌다. 나그네는 본향을 향하는 사람이기에 길 위에 머무르지 않는다. 주저앉지 않는다. 인생을 지구별 나그네처럼 산다.
나는 나그네로 왔는데
왜 주저앉게 되었나
나는 청지기인데
언제부터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버렸나
<믿음이 없이는> 히즈윌(HisWill) 가사 中
나그네로 지구별에 왔는데 영원히 살 것처럼 꾸역꾸역 물건들을 쟁여 놓는다. 언제 필요할지 모른다며 집이 작든 크든 시간이 흐르면서 여전히 가득 찬 상태가 된다. 하나하나 물건을 들이는 것은 내 마음속이 그렇게 무거워지고 복잡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마음이 담백하면 자신의 거처도 단출하다. 집안에 쌓인 가구와 물건들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상태를 대충 읽을 수 있다. 내 마음상태가 곧 내가 거처하는 장소를 차지한 물건의 상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의 생전 부엌에는 밥솥 하나 그릇 몇 개뿐이었다. ‘무소유’를 몸으로 삶으로 보여줬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라고 스님은 '무소유'의 정신을 압축했다.
필요한 것 이상을 소유하는 것은 내 마음에 찌꺼기가 내려앉는다는 증거다. 하나하나 소유를 늘려갈 때마다 내 마음에 흐르는 혈액은 혼탁해지고 혈관이 좁아진다. 마음을 맑고 담백하게 하는 건 눈에 보이는 물건에 대한 애착부터 버리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을 멈추면 마음은 담백해진다.
명절이 돌아올 때면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는 크고 작은 부피의 선물을 가장한 뇌물들이 책상 주변에 쌓였다. 선물들을 주위에 흐르게 하기도 했지만, 집으로 가져간 것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더 후배와 어려운 사람에게 더 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 지금은 명절이 되어도 들어올 곳은 없다. 나의 자리 때문에 선물을 가장한 뇌물(?)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내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는 건 이 땅의 소유물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이 땅의 보물은 잃어버릴 염려가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은 그렇지 않다. 마치 눈에 보이는 물건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처럼 말이다.
바로가 야곱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 47:8~9 새번역)
성경은 나그네의 기록인데, 내 삶은 그렇지 못했구나. 늦은 밤, 집으로 향하는 산골 밤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니 눈에 선명한 별똥이 까만 하늘에 선을 그리며 반대편으로 사그라진다. 내가 사는 시간은 이렇듯 짧게 반짝하고 사라지지만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도 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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