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대한민국 애국가 2절의 첫 소절이다. 초등학교 때 운동장에 모여 4절까지 불렀던 기억이 떠오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부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의 4절 마지막 소절까지 2분 분량 가사를 불러야 끝났다. 2절의 철갑(鐵甲)은 껍질이 두껍고 단단해 철 갑옷을 두른 듯한 소나무 모습이다. 겨울바람과 서리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고 푸르름을 유지하는 소나무처럼 시련이 있더라도 견디며 이겨내자는 의미다.
겨울 새벽, 시골 마당에서 추위를 견딘 승용차 지붕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겨울 하면 하늘에서 하얗게 흩어져 내리는 눈을 상상한다. 나는 소나무 껍질이 떠오른다. 푸르를 때는 보이지 않던 소나무 껍질의 선명하게 갈라진 무늬가 더욱 도드라진다. 봄, 여름, 가을은 꽃과 녹색이 숲을 차지한다. 벌레들도 그 사이를 누비며 분주한 시간을 보낸다. 겨울이 되면 숲은 잿빛으로, 벌레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겨울 숲의 주연은 정적이다. 조연은 바람이다. 바람은 정적을 더욱 깊게 파고든다. 숲은 맨살이 된다. 바람은 나무의 표피를 할퀴며 숲을 돌아다닌다. 겨울은 숲의 속살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시기다. 엑스레이 사진에 뼈만 보이듯 겨울은 숲의 뼈대를 볼 수 있다. 나무마다 껍질이 제각각 형태와 무늬를 드러낸다. 겨울에 나무를 구별할 수 있는 부분은 껍질이다. 껍질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게 소나무 껍질이다.

오래된 소나무일수록 표피의 갈라짐은 오래된 화석처럼 기이하고 신비하다. 코르크 재질이라 팽창을 견디지 못하고 가로 세로 쩍쩍 갈라진다. 갈라지면서 그 속은 더욱 깊어간다. 매끈하게 감쌌던 표피는 성장할수록 갈라진 면은 깊이 파인다. 철갑을 두른 소나무의 껍질을 만지고, 그 사이 틈을 보노라면 심연과 함께 인생이 지나온 흔적이 보인다.
소나무 껍질의 두터움과 갈라진 부분을 자세히 보면 예술작품 같다. 추상적인 무늬로 간격을 유지한 채 나무를 둘러싸고 있다. 오래된 소나무일수록 갈라진 껍질들은 비정형의 거대한 집합체이다. 하나하나 개성을 드러낸다. 삐뚤빼뚤 가로와 세로의 선들이 불규칙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미를 유지한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지층을 보는듯하다.
소나무 껍질의 갈라진 폭과 깊이에 따라 세월이 지나면 이끼가 자리 잡는다. 거미가 집을 짓는다. 오래된 소나무 껍질에 새로운 생명이 깃든다. 보면 볼수록 인간의 삶과 닮았다. 소나무는 겉은 갈라지고 파였지만 그 속살은 여전히 싱싱함을 유지하며 힘차게 물을 빨아올린다. 사람도 늙어가지만 정신만은 날로 새롭게 되는 것처럼 소나무는 겉이 늙었다고 속은 늙지 않는다는 것을 제 몸으로 보여준다.
노각나무는 버짐이 일어나는 것처럼 표피가 떨어져 나간다. 배롱나무, 모과나무도 줄기가 굵어지면서 겉껍질이 탈락해 언제나 표면은 매끄럽다. 어린 나무든 성장한 나무든 굵기와 상관없이 미끈함을 유지한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처럼 세월이 지나도 싱싱한 표면이다. 은사시나무는 마름모꼴 형태의 무늬가 표피에 생긴다. 겨울나무는 저마다의 인간군상을 보는듯하다
소나무는 자라면서 표피는 갈라진다. 갈라질지언정 떨어지진 않는다. 추위로부터 내부를 보호하고 외부 충격을 완충한다. 소나무 껍질은 나이가 들수록 투박하면서도 입체적이 된다. 툭툭 튀어나와 근육질 같다. 소나무 둥치가 굵어질수록 철갑의 경계는 더욱 깊어지고 멀어진다. 얼굴과 손의 주름과 닮았다.
햇빛을 향해 자라는 뒤틀린 소나무는 경이롭다. 뒤틀리면서도 위로 향하며 버티는 게 사람의 인생과 닮았다. 인간은 뒤틀린 목재라는 건 소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저마다 세상을 지나온 흔적에 따라 뒤틀림의 정도와 자란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표정에선 알 수 없지만, 그 속은 저마다의 고민들로 아팠던 흔적과 신산함을 가지고 있다. 소나무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송진을 분비하듯 인간도 소나무처럼 혹을 내부에 갖고 있다.
뒤틀려 자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하늘을 향해 푸르름을 유지하는 소나무처럼, 인생도 손과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파이지만, 땅에 뿌리를 내린 채 삶을 살아낸다. 몸과 마음에는 깊은 상처의 흔적이 있어도 노인들은 여전히 어린아이와 청춘이라고 입에 달고 산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뿐이지 속은 항상 청춘이라고 한다. 백발이 성성해도 그 안에는 소녀소년이 산다.
인간은 소나무 껍질을 닮았다. 오래 볼수록 투박하면서도 정감이 간다. 내 얼굴과 손에 생기는 주름의 변화를 소나무 껍질을 보면서 동질감을 느낀다. 얼굴 근육은 오랜 세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책장을 넘기던 손은 눈으로 보면 매끈하게 보이는데 사진을 찍어보면 영낙없이 노인네 손이다. 어느새 동안(童顏)을 동안(冬顔)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느새는 시간을 빠르게 날아다니는 새임이 틀림없다.
살을 에는 찬바람 소리를 들으며 겨울 숲길을 걷는다. 소나무 껍질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등을 대고 하늘을 본다. 돌아서서 둥치를 껴안는다. 마치 나를 껴안듯 지나온 세월을 감싸며 토닥인다. 겨울 숲길에서 흔히 만나는 뒤틀리며 자라고 있는 소나무와 켜켜이 쌓인 투박한 껍질과 틈새에서 나를 만난다. 화살같이 죽음이란 과녁을 향해 직진하는 어느새에 납치된 세월은 눈떠보니 예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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