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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하지 않음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不爲之爲)

일기/유유적적(裕裕寂寂)

by 풀꽃처럼 2026. 9. 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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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알짜배기 공기업에서 정년을 꽉 채우고 자유인이 된 친구를 만났다. 실업급여를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하는 중이었다. 직장 생활할 때부터 손해사정사를 준비하더니 최근 2차를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경비지도사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경비지도사는 현장에서 근무하는 경비원들을 지도, 감독, 교육하는 총괄 책임자다. 월요일 도서관이 휴관이라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현역에서 대표이사를 하는 친구, 회계사, 세무사, 감정평가사 등 각종 자격증을 취득해 여유롭게 살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금융업, 대기업 등 사회 곳곳에 진출한 친구 중 잘 나가는 친구들도 있고, 중간에 그만두고 택배기사를 하는 친구, 한 때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파산하고 병으로 일찍 죽은 친구 소식을 건너서 듣곤 했다. 정치판을 기웃거리더니 여전히 언저리에서 아등바등하는 친구도 있다.

 

현업에 있을 때와 은퇴한 후의 상황은 180도 다른 환경이다. 조직에서 떠난 개인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가까운 친구는 80세까지 일을 하겠다며 전국을 누비며 왕성하게 직장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만났던 친구도 신입사원 입사하기까지 많은 좌절을 겪은 경험으로 일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정년을 채웠음에도 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육체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양한 시험 정보를 주워들은 후 계속해서 공부 중이다.

 

이들과 인생 후반기에 만나 얘기하면 공통점은 여전히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한다. 일을 하지 않고 지내겠다는 친구는 없었다. 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그만뒀는데…. 내가 별종이었나보다.

 

은퇴 세대는 역설적으로 일을 하길 원한다. 자유시간이 무한정 주어졌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不爲之爲) 것을 견디지 못한다. 매일 아침 갈 곳이 없다는 것에 불안해하고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꼭 해야만 한다’라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현실 정치의 환멸을 박차고 공직을 훌훌 벗어버리고 전원생활을 선택했다. 그가 공직에 있을 때 부하직원이 상급 감독관에게 예를 표해야 한다고 하자 그는 "내가 어찌 쌀 다섯 말(당시 현령의 월급)의 쥐꼬리만 한 봉급 때문에 시골의 조무래기 같은 녀석에게 허리를 굽히겠느냐!"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줄이 없는 거문고로 자연의 소리를 퉁기며 여생을 보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지킨 은퇴의 아이콘이다.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 스스로 고립되어 2년 2개월 보낸다. 당시 미국은 산업혁명에 속도가 붙어 모두가 일을 더 많이 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일중독의 사회였다. 그는 미친 듯한 속도전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하지 않음’을 선택했다. 하루 종일 호수를 바라보고 사색하는 삶을 실천했다. 그도 하지 않음을 했다(不爲之爲).

 

은퇴 후 밀려오는 불안함(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은 산업사회가 노리는 바다. 자본주의는 욕망이란 석탄을 원료로 질주하는 기관차다.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를 소유하고 소비하는 무한 반복행위로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하나뿐인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하는 공장이 아니다. ‘하지 않는 것을 한다’라는 건 삶의 허무를 채우는 게 아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본모습을 돌아보는 사색과 반성의 시간이다.

 

달력에 꽉 찼던 일정이 비었다고 서러워 말자. 카카오톡 무수한 이름들이 화석화되어도 아쉬움을 갖지 말자. 몇백 건의 연락처 전화가 울리지 않아도 담담해지자. 가만히 몸을 타고 흐르는 시간을 음미하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땅 만 바라보며 살았던 날들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유를 갖자. 산업화에 갇혔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했던 감정을 내려놓자.

주말에 넷플릭스에서 《내 이름은 앙네타》(2026년)란 스웨덴 영화를 봤다. 49세의 중년 여성 앙네타가 갑작스러운 실직 후 프랑스 프로방스로 떠나며 자아를 찾아가는 줄거리다. 자신을 잊고 살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지냈던 갑갑한 알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성으로서 타인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몸 콤플렉스까지 벗어던지며, 자신을 가두고 있던 쇠사슬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해방감을 누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읽으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부러워하지만, 주위에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염려스러운 시선을 보낸다. 월든의 소로는 어슬렁거려도 추앙받지만,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왜 저렇게 일을 하지 않고 게으를까 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의 단편 소설 『일할 의욕을 떨어뜨리는 일』(1963)에는 한 여행객이 부둣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어부에게, 왜 부지런히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서 작은 어부의 왕국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졸고만 있느냐고 묻는다. 어부는 왜 그래야 하냐고 되묻는다. 여행객은 그래야 햇볕을 쬐며 편안히 잘 수 있다고 답한다. 그러자 어부는 태연히 툭 내뱉는다. “내가 지금 벌써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일을 하면 된다. 책을 읽는 것이 행복이라면 책을 읽으면 된다. 타인을 돕는 것이 행복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어 남 눈치 보지 않고 영화 속의 앙네타처럼 자유를 누리면 된다. 나는 여전히 하지 않음을 하며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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