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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인생의 길이

일기/산골일기(하동 의신마을)

by 풀꽃처럼 2024. 6. 2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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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을 위해 일할 때는 피로하고 어떤 때는 일을 멀리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일의 보람을 찾아 할 때는 피곤이나 일에 대한 혐오감 같은 것이 없어졌다. 또 다른 변화도 뒤따랐다. 수입을 위해 하는 일은 수입과 더불어 끝나곤 했다. 그런데 일을 찾아 일을 선택했을 때는 일이 또 다른 일을 만들어 더 많은 일을 하고 수입도 자연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의 성취감에서 오는 행복이 무엇인지 터득할 수 있었다.
김형석, 백 년의 지혜, 21세기북스, 2024
 
2024년 104세를 살고 있는 김형석 씨. 일제 강점기, 광복, 6.25 전쟁, 이승만부터 2024년 윤석열까지 오랜 시간을 살고 있다. 우주의 눈으로 보면 티끌조차도 안 되는 기간이지만, 땅에 발을 디딘 인간 기준에선 오랜 기간을 살았다. 북두칠성 중 가장 멀리 있는 별은 두브헤다. 두브헤에서 출발한 빛이 지구에 도착하려면 124년이 걸린다. 결국 지금 산골의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북두칠성은 124년 전의 모습이다(태양은 8분 20초 전의 모습이다).

1990년 보이저 1호가 60억km 거리에서 찍은 지구. 미항공우주국 제공

지구에서 관측 가능한 우주의 가장자리까지는 465억 광년이다. 지구 수명을 50억 년이라고 하면 지구가 9개 생겼다가 없어질 수 있는 시간이다. 우주에서 생명을 다한 별이 폭발한 잔해가 모여 지구를 형성했다. 초기에는 암흑과 같은 공간이었고, 공룡이 살았었고, 유인원이 살았다. 한때 공룡이 지구의 지배종이었고 지금은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종이 되었다. 그 지구에서 인생의 길이가 100년도 길다고 하는 건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찰나(75분의 1초)보다도 훨씬 짧은 시간이다.

2014년 화성에서 본 지구. 미항공우주국 제공

우주 나이에 비하면 인간 수명은 하루살이가 인간의 시간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짧디 짧은 인간의 시간을 자세히 보면 희로애락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인생이 왜 이리 긴지... 하늘을 보면 인간은 하루살인데, 땅을 보면 인생은 망망대해다. 앞을 보면 영원할 것 같고, 뒤를 돌아보면 순식간이었다.
 
25년간 직장생활은 멋모르고 살아야 했던 30대부터, 조직의 뼈대(?)로 움직였던 40대부터의 시간은 일과 함께 보냈다. 지금은 일의 무게를 내려놓고 시간의 여유 속에서 유영중이다.
 

60세에서 75세까지는 왕성한 인간적 성장, 학문과 사상적 짐을 요청해 왔다. 80세까지는 대학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사상적 창조력에는 큰 어려움 없이 일할 수 있었다. 95세까지는 일할 것 같다는 자신을 가졌다. 95세가 되니까 정신적 노력에는 변화가 없는데, 신체적 한계와 노쇠현상이 인간적 성장과 활동을 저해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나 자신이 신체적 늙음을 극복하면서 정신적 과업을 담당하는 갈등과 모순이 뚜렷했다.

김형석, 백 년의 지혜, 21세기북스, 2024

 
대부분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50대에서 60대에 걸쳐 인생 2막을 시작한다. 평범한 사람이 한국에서 인생 2막은 뒷방 늙은이의 모습에 가깝다. 직장을 중심으로 사회적 지위가 형성되었던 세대에게 2막은 새로운 모험이기보다는 인생의 씁쓸함을 느끼는 시기다. 외형적으로 소득은 쪼그라들고, 자신의 보호막이었던 직위는 눈 녹듯 사라진 시기다. 왕년의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대화는 ‘나는 꼰대다’고 고백하는 꼴이다.
 
김형석 씨는 전직 교수라서 그럴까. 왕성한 노년을 보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95세까지는 지치지 않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청춘은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한다고 정의를 내린 사무엘 울만이지만 늙은 건 늙은 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고후 4:16 새번역)
 
나이가 들수록 이해도가 깊어지는 구절이다. 인생은 각자 수명이라는 긴 끈을 당겨가며 살고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남은 끈의 길이가 점점 짧아진다는 거다. 그 끝에는 죽음이라는 열쇠가 기다린다. 화장실 롤페이퍼를 당기면 끝이 있는 것처럼 더 이상 당길 수 없는 마지막 휴지를 쓰는 게 인생의 길이다.
 
인생의 길이가 우주에선 찰나보다도 가소로운 시간이지만, 지구란 땅에 있으면 기구한 시간의 밭을 계속해서 일구는 시지프스처럼 반복되는 시간이다. 우리의 눈을 하늘에 두느냐 땅에 두느냐에 따라 인생을 보는 관점이 바뀐다. 인생의 시간 끈을 당길수록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시간을 살고 싶다. 화장실 휴지는 갈아 끼울 수 있지만, 인생이란 휴지는 갈아끼울 수 없는 단 하나의 유일한 일회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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