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알람이 울린다. 6월 초를 지나는 여름이지만 산골의 새벽은 여전히 쌀쌀하다. 겨울 동안 방 한쪽을 차지했던 텐트 속에서 기어 나온다. 산골에서 겨울나기는 텐트가 필수다. 장작을 많이 넣으면 등은 뜨거워도 배 위쪽은 차가운 공기가 지배한다. 텐트는 차가운 공기를 막아주는 보호막이 된다. 오늘 산 아래 한낮의 기온이 32도까지 올라간다는 예보가 있지만, 산 아래 온도일 뿐이다. 산 위에서는 참고사항이다.
산 위와 아래의 생활 차이를 가장 확연히 느끼는 시기는 봄에서 여름까지의 기간이다. 초여름까지 산골생활은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는다. 봄날 두꺼운 겨울 옷을 입고 산 아래 내려가면 외계인이 된다. 다들 가벼운 봄옷인데 여전히 홀로 겨울옷을 걸쳤기 때문이다.
요가매트에서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문을 열면 맞은편엔 삼성산이 늘 그 자리에 있다. 청학동 댕기머리 마을이 있는 그 삼성산이 마을 앞산이다. 차분히 가라앉은 공기로 시야는 깨끗하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언제나 길냥이는 ‘냐옹’하고 아침 인사를 건넨다. 달리기 앱을 구동시켜 시작버튼을 누르고 새벽 도로에 나선다.
조깅 코스는 해발 390m 마을에서 220m까지 왕복 8km 거리다. 내려갈 때는 가볍게 달리지만 돌아올 때는 오르막이라 반보를 쉼 없이 교차시키며 가쁜 쉼을 펌프질 한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도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숲 속에서 울어대는 온갖 새들의 합창을 듣는다.
도로는 뽕나무에서 절로 익어 떨어진 새까만 오디열매가 그대로 있거나 밟혀 도로가 새까맣게 칠해져 있다. 오디열매는 소화를 촉진시키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열매를 먹으면 방귀가 뽕뽕 나온다고 해서 뽕나무로 불린다. 오디열매 대여섯 개를 한 입에 털어 넣으면 달달한 맛이 난다.
새벽 달리기는 홀로 새벽을 두드리는 목탁 소리처럼 한 발 한 발 도로를 두드린다. 생각은 머리에서, 무아지경은 발에서 이중화음이 되어 도로를 달린다. 한 발 한 발 도로들 두드리며 아무도 없는 길 위에 서면 세상은 마치 멈춘 것처럼 평화롭다.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생각의 타래들이 발들이 교차될 때마다 도로로 빠져나간다.
새벽을 깨우는 목탁만이 깨우침이 아니다. 교회에서 새벽마다 울리는 기도만이 깨우침이 아니다. 깨우침은 생활속에도 있다. 고사리를 꺽는 손에도, 고로쇠를 채취하기 위해 길 없는 산을 누빌 때도, 혼잡한 지하철 안에서도, 생각의 끈만 놓지 않는다면 깨우침은 어디에나 있다. 정해진 사회의 법 테두리 안에서 ‘법대로’ 살았지만, 태연하게 수백만의 유태인을 죽이는 결과가 되어버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한길그레이트북스, 2006)처럼 사유의 끈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2000년부터 달리기를 시작했으니 20년이 훌쩍 넘었다. 20년 넘는 시간동안 꾸준하게 달렸다고 할 수 없다. 배불뚝이가 되었다가 공비처럼 말라깽이가 되었다가 반복을 했다. 초기에는 전국 온갖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열의가 넘쳤다. 일본 대마도까지 뜨거운 여름 도로를 달렸다.
달리기는 거짓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한 발, 한 발을 내디뎌야 나아간다. 그래서 나는 도구를 이용하는 운동보다는 맨몸으로만 움직이는 걸 선택한다. 등산도 식량만 짊어질 뿐 두 다리와 두 손으로만 움직이며 나아간다. 달리기 속도를 늦춘 걷기 역시 선호한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사는 인간사회는 여전히 서툴다.
달리기는 시작이 절반이다. 집에서 반 발만 나서면 일단 달리기의 반은 끝낸 거다. 4km까지 달리면, 돌아오는 4km는 어차피 달려야 하는 거리이기에 절반은 자동으로 채워지는 운동이다. 투자수익률 100% 운동이 왕복 달리기다. 습관은 오직 반보의 내디딤에서 시작한다. 반보만 움직이면 된다.
30대 초반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렸다는 작가 하루키는 달리는 것은 체력과 지구력을 높이는 ‘지속하는 힘’이라고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2009)에서 밝혔다. 그의 희망 묘비명이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처럼 나 역시 달리는 중간에는 걷지도 쉬지도 않는다. 천천히 갈지라도 속도가 절반으로 줄어들지라도 걷지는 않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고, 지속하는 꾸준함은 달리기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새벽도 연두색 러닝화에 발을 밀어 넣고 신발끈을 조인다. 차가운 새벽공기는 나만이 마신다. 한 발 한 발 도로를 두드리는 이 시간만큼은 혼자가 좋다. 사람이 없으면 홀로 외롭지만, 새벽의 외로움은 평화다. 고독한 러너, 도로를 두드리는 침묵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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