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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내 머릿속 들여다보기

일기/산골일기(하동 의신마을)

by 풀꽃처럼 2024. 11. 16.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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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는 눈으로 볼 수 있다. 머릿속은 MRI로 해골 속 뇌의 형태는 살필 수 있다. 뇌 속에서 움직이는 혈류도 볼 수 있지만 뇌세포 속의 저장된 정보는 볼 수 없다. 내 머릿속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방 한켠에 정리된 책들이다. 그 각각의 책장들에 새겨진 글자들이 시신경을 통해 뇌에 새겨졌다.

방 한켠에 살아남은 책들

내 사고에 망치를 때린 글자들은 기억의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글자는 그물을 지나치는 바람과 물처럼 빠져나갔다. 바람의 흔적과 물의 자국만이 기억되지 못한 채 찌꺼기처럼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책등의 제목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단단한 흙속에 묻혔던 기억이 가까스로 일어선다.

 

매년 버려진 책들과 이사하며 떠나보낸 책들을 걸러내고 지금껏 벽 한쪽에 남아있는 책들은 아직까진 손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고원정 작가의 빙벽은 매주 본방을 사수하고 싶은 잘 만들어진 드라마처럼 다음 편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읽었던 대하소설이다. 대학 3학년에 복학하여 마음을 다잡고 공부해야 할 때 조직관리 교수가 추천했던 책이다.

군대의 만들어진 신화에 저항하는 군상들을 다룬 책으로 기억한다. 군사문화의 잔재가 남아있던 80년대 말 군대 내 거대한 빙벽에 송곳으로 자국을 내기도, 부서지기도 하는 스토리다. 2023년 귀신 잡는 해병대였던 채상병의 죽음을 보며 여전히 군대는 우상의 땅이요, 드러나기를 거부하는 철의 장막이다. 총 9권의 『빙벽』이 마무리되고, 『불타는 빙벽』 3권에서 빙벽은 허물어진다. 소설 속에선 군대 우상이 무너지지만 현실에선 채상병의 진실은 우상의 탑에 여전히 가두어져 있다.

 

『기습』 4권 시리즈는 변소치기 하인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벼락 성장기를 다루었던 소설로 기억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타지인 포항에서 직장 생활할 때 힘이 되어주었던 책이었다. 맨주먹이었던 청춘시절, 젊음으로 싱싱했지만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벌거숭이 시절에 영양소가 되었던 소설이다. 유홍준의 책들은 예술에 대한 안목과 작고 숨어있던 작품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자기만의 해석과 안목을 길러주었다.

하나하나의 책들이 바람의 흔적처럼 그물에 걸려있다. 가물거리는 흔적들이 책꽂이를 통해 소환되는 작은 행복감이자 복습을 통해 생각을 단련하는 계기가 된다. 운동기구를 통해 근력을 키우듯 책은 눈을 통해 전기신호로 뇌를 자극해 생각 근육을 단련한다. 몸을 쓰지 않고도 뇌는 시대와 지역을 축지법으로 건너가는 호리병 속의 별천지다.

 

책들이 가지런히 나에게 등을 보여주며 기억의 저편 구석구석에 먼지를 일으키는 정지화면이다. 까무룩 기억이 툭툭 일어서는 방아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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