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성경을 최초로 영어로 번역 시도한 영국 신학자 존 위클리프. 성경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야 함을 주장했고, 사후 교황청에 의해 부관참시되어 화형을 당했다. 그는 성공회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축일은 12월 31일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신학자다.
위클리프는 왕과 함께 교황청을 방문했을 때 교황의 세속화와 라틴어 성경의 독점에 대한 혐오로 영어 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교황청이 성경해석을 독점하는 것에 반발하며 성경의 권위는 교황보다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통치자들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 섬김 받는 존재가 아니라 섬기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지배자의 이득이 아닌 피지배자의 이득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로마 교황청은 1415년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아 라틴어가 아닌 영어로 설교한 얀 후스를 이단으로 선고했고, 위클리프를 무덤에서 꺼내 그의 책들과 얀 후스와 함께 화형 시켰다. 얀 후스는 체코의 신학자로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성서가 믿음의 유일한 권위라고 했다. 1412년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를 비판했고, 농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라틴어가 아닌 영어로 설교했다. 교황청은 라틴어 외에는 어떠한 언어로도 설교나 번역을 금지하여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얀 후스의 뒤를 이어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완성한다.
종교개혁은 곧 성경번역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무오류의 화신이라 일컫는 교황의 권위보다 성경이 최고의 권위라는 것을 일반인들은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말씀인 성경에서 나온다. 읽는다는 행위, 독서는 사람을 바꾼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종교개혁은 성서 읽기 혁명이라고 한다. 성경에는 교황이 최고 권력자란 말이 없다. 추기경, 대주교, 주교 자리도 없다. 교회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고, 면죄부는 더더욱 없다. 중세 가톨릭에 반기를 든 혁명은 성경 제대로 읽기였다. 읽기는 자국의 언어로 된 성경을 통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기도하는 손을 자르고 성경 읽기를 주장했다. 읽는 행위는 생각과 기도를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대한성서공회 자료에 의하면 2023년 말 기준 성경은 743개의 언어로 번역, 보급되었다. 아직 1억 9천만 명 정도는 자신의 언어로 성경번역이 되지 않았지만, 웬만한 사람은 성경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2023년 국민독서실태조사 자료에 의하면 10명 중 6명은 1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도서 구입은 연간 종이책 1권이다. 20대 독서율은 74.5%로 가장 높았고, 60세 이상은 15.7%로 나이가 들수록 책을 읽지 않았다. 60대로 갈수록 여유시간은 많을 듯한데 오히려 독서율은 가장 낮다.
2017년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신앙의식조사 결과에 의하면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은 20%이고, 75%가 평소 성경을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목사는 연간 신앙서적 44권, 일반서적 23권 총 67권을 읽어 일반인보다 많은 양을 읽었다.
이제 최후의 성경번역이 남아있다. 제 몸으로 된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문맹에선 벗어났고, 성경번역의 홍수 속에 현대인은 살고 있다. 정작 종교개혁은 성경 읽기로 완성했지만, 갈수록 행복지수는 떨어지고 있다. 세상의 변화속도에 종교가 쓸려가고 있다는 말이다.
존 위클리프가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었던 라틴어 성경을 봉인해제했고, 마르틴 루터는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완성했다. 이후 500년이란 긴 시간을 성경번역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이제 자신의 몸으로 성경을 삶으로 번역하는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예수가 성경을 온몸으로 생활 속에서 번역하여 보여준 것처럼 성경을 제 몸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한국교회는 카톡교와 유튜브 신앙에 성경 읽기는 뒷방에 가둬놓은 게 아닐까. 나이 들수록 독서하지 않는 결과에 반기를 들어 오히려 늙어가면서 책을 더 읽어, 모범을 보이는 기독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성경을 독서란 제삼자의 입장에서 텍스트를 읽는 게 아니라 예수처럼 낮은 자세로, 위로 올라가려는 자는 내려가야 하고, 섬김을 받기 위해서는 섬겨야 하는 것처럼, 지배자의 이익보다는 피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는 것처럼(행 20:3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있었던(요 1:14) 것처럼, 성경이 각자 몸의 언어로 이웃과의 삶 가운데 함께 해야 하는 새로운 종교개혁, 각자 몸으로 쓰는 성경번역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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