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은 1894년 한반도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종주권을 두고 벌인 전쟁이다. 1895년 3월 전투는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조선은 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일본 제국주의 침략대상이 되었다. 청나라는 대만을 일본에게 넘겨주었다. 일본 측 협상 대표는 이토 히로부미였다. 대만은 일본이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데 있어 전진기지인 최초의 식민지가 되었다.
대만은 1580년경 스페인 사람이 대만을 에르모사(Hermosa, 스페인어로 ‘아름다운’) 섬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에르모사는 포르투갈의 포르모사(Formosa)의 스페인식 표기다. 지금의 대만(Taiwan)이란 명칭은 청나라 말기부터 불렸다.
네덜란드는 1624년 대만 남부인 다위안(현재 타이난)에 상륙해 최초의 정권을 수립했다. 이때의 문자기록을 근거로 대만 역사를 400년이라고 한다. 대만 남부를 차지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동아시아 수익률은 일본이 1위, 2위가 대만일 정도로 대만은 주요한 지역이 되었다. 이익이 탐이 난 스페인은 대만 북부를 점령한다. 이후 명나라는 네덜란드를 몰아냈고, 1683년 청나라 강희제는 대만을 정복해 청나라에 복속시켰다.
일본은 대만을 지배할 당시 문과 출신을 보내 한국보다는 온화한(?) 정책을 펼쳤다. 한국의 경우 군인 출신이 통치해 식민지 말기 징집과 창씨개명을 강제로 시행했다. 대만은 선택적으로 제도를 시행하여 자의적으로 창씨개명이나 징집을 지원할 경우 혜택을 주는 정책을 시행했다. 대만도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독립을 맞이한다.
대만 인구의 약 98%는 한족이고, 나머지는 원주민이다. 한족의 80%는 명청시대부터 중국대륙 남부지역에서 이주해 온 본성인과 공산당에 패해 장개석과 함께 건너온 사람들인 외성인 20%로 나뉜다. 대만으로 건너온 외성인들은 대만의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본성인보다 월급이 2배나 많았고, 부정부패와 요직을 독점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일본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강제로 국어(중국어)를 강요해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본성인들은 이를 두고 ‘일본이라는 개가 떠난 자리에 중국 돼지가 왔다(狗去猪來)’고 불평한다. 대만인들이 일본인에 대해 한국보다는 덜 반감을 가지는 이유다.
1947년 2월 28일 본성인들이 항쟁을 일으키자 장개석 정권(국민당)은 이들을 학살했다. 2월부터 5월까지 3개월 동안 3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 국민당은 1949년 계엄을 선포해 1987년 그의 아들(장징궈)이 계엄을 해제한 기간이 38년이나 된다.
1979년 12월 대만 가오슝에서 잡지사인 ‘메이리다오(미려도, 美麗島, Formosa)‘에서 주최한 시위로 경찰관과 충돌한 사건은 대만 민주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경우 1979년 10월 부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 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과 유사한 사건이었다. 현재 미려도 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하철 역 2위에 선정될 만큼 가오슝에서 꼭 들러야 할 명소가 되었다. 제주도가 아름다운 섬이지만 곳곳에 4.3 희생자의 얼룩이 있는 것처럼 대만도 아픈 현대사를 한국만큼 가지고 있는 곳이다.
메이리다오 사건을 변호했던 천수이볜(陳水扁)은 2000년 대만 최초로 민진당이 국민당을 꺾어 최초로 대만 본성인이 정권을 장악한다. 대만은 4년 중임제이기에 그는 8년을 재임했고, 2016년까지는 국민당이, 2016년 이후는 민진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2024년 라이칭더(賴清德) 정권은 성격상 '반중' 기치를 내세우는 정당이기에 현재 대만과 중국사이 양안관계 긴장은 높다. 국민당의 뿌리는 중국이기에 국민당이 정권을 장악하면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중국과 긴장이 완화된다. 선거철마다 중국의 CCTV는 대만의 타이베이와 생방송으로 연결해 선거상황을 방송한다.
대만 남부의 가오슝은 명청시대부터 살고 있던 본성인이 많아 민진당을, 대만의 수도인 타이베이는 북부지역으로 장개석 정권과 함께 넘어온 외성인이 많아 국민당을 지원하는 경향이 강하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대만과 일본은 한국 특수를 누린다. 일본은 전쟁 중에 수많은 전쟁물자를 미국에 납품해 패전 이후 오늘날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미국은 공산 세력(소련, 중국, 북한)을 봉쇄하기 위해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1965년까지 매년 1억 달러씩 총 15억 달러를 원조했고 UN에서도 유일한 중국 대표로 인정했다.
1966년 대만 정부는 가오슝 지역에 세계 최초로 수출 가공 공단을 설치해 관세를 면제해 해외투자를 적극 유치했다. 수출 가공 공단은 대만의 경제기적을 견인했다. 물론 한국전쟁 특수로 마련한 재원이 투입되었다.
1969년 3월 중소 국경분쟁이 일어나면서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처럼 1971년 중국과 미국은 핑퐁 외교로 가까워져 1972년 대만은 유엔을 탈퇴하고 미국은 1979년 대만과 단교한다. 1948년 한국과 대만이 수교한 이후 1992년 한국은 대만과 단교한다. 대만은 한국전쟁 파병으로 한국을 도와줬는데 단교를 당했다며 한편은 억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한국전쟁 특수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중국과 미국의 세계패권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면서 대만과 미국은 다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22년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했다. 2000년대 후반은 한류가 주류였고, 지금은 한국의 떡볶이, 김밥, 불고기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4개 국가의 역사를 보면서 국가 간 외교에는 정의는 없고, 실익만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다. 한중일 동북아 역사에 대만을 넣어보니 서로 물고 물리는 역동적인 역사가 마치 생물처럼 보인다. 993년 고려의 서희는 거란의 전쟁위협에 오히려 압록강 동쪽인 강동 6주를 외교로 차지했다. 고려의 외교정책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NCND, Neither Confirm Nor Deny).
한국은 2025년 2월 현재 탄핵사태로 내란과 외환의 늪에 온 국민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세계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 한국의 주력기업인 삼성은 미래 동력을 잃었고, 2025년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외교에는 아군과 적군이 없다. 탄핵을 빨리 마무리하고, 오직 국민의 행복을 위해 정부는 고려의 서희처럼 지혜가 필요한 시기다.
참고문헌
1. 우이룽. 『드디어 만나는 대만사 수업』. 박소정(역). 현대지성, 2024
2. 최강호. (2014). 대만인의 국가정체성 변화:‘중국화’인가? ‘대만화’인가?. 중국학논총, (43), 131-159.
3. 김윤태. (2023). ‘중화 민족주의’ 강요와 ‘대만 정체성’의 형성. 동아인문학, 64, 227-256. 10.52639/JEAH.2023.09.6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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