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드니 몸 곳곳에서 수리할 부분이 툭툭 튀어나온다. 한 달 보름 전 비뇨기과에서 전립선 비대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새벽마다 깨어서 화장실을 가야 하는 불편함이 나이가 들어서 그런 줄 알았다. 일체의 카페인을 중단하라는 의사의 엄명을 받았다. 살기 좋은 산골에서 매일 좋은 차를 마시는 즐거움이 일순간에 삭제되었다. 커피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한 달 보름간의 철저한 카페인 금식을 따랐다고는 할 수 없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G1 등급의 원두는 특히나 피할 수 없었다. 겨울에 지내기 좋은 대만 가오슝 한 달 살기 동안 현지식으로 해결할 때는 요구르트로 식후를 해결했다. 오전 중국어 학원 1시간을 마치고 근처의 파스타 맛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는다(정오에 가면 자리가 없다). 걸어서 집에 오는 길에 커피 맛집에 들러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G1 내추럴 커피 한 모금은 피할 수 없는 경로였다.
3월 중순 한국 지리산 산골로 돌아오니 겨울은 여전하다. 가오슝에선 반팔을 입었지만, 산골에선 다시 겨울옷으로 체온을 유지한다. 방안의 냉기는 한겨울보다는 견딜만한다. 해발 400미터 고지의 울울창창 숲 속에 둥지처럼 자리한 마을이다. 평지보다도 체감온도는 훨씬 낮다. 해가 하늘 중간에 떠 있을 때 잠시 따뜻하지만, 4시 정도 해가 산을 넘어가면 나무사이에 숨어있던 찬기운이 급속도로 냉기를 뿜어댄다.
오랜만에 악양에서 지인과 점심을 먹고, 카페 정서리를 방문했다. 악양은 757년 신라시대 소다사현(小多沙縣)에서 악양으로 고쳐 불렀다. 악양은 중국 후난성의 도시이름이기도 하다. 후난성 악양루 앞에 동정호가 있듯 하동 악양에도 동정호와 악양루가 있다. 옛날 중국의 지명을 그대로 따라한 듯하다. 중국 후난성의 악양루는 바다와 같이 너른 평원에 위치해 있듯 하동의 악양루도 너른 벌판(중국보다는 비교할 수 없도록 작다)에 있다.
악양(岳陽)이란 한자에서 드러나듯 악양벌판은 사시사철 햇볕이 화살처럼 내리 꽂히는 지역이다. 햇살을 피할 곳이 없는 너른 평지다. 산골은 추위를 느끼지만 악양 벌판에 들어서면 볕이 뜨겁다. 대봉감 주산지인 만큼 하늘을 가리는 키 큰 나무들도 없어 고스란히 해에게 노출된다.
악양에서 조금 들어오면 카페 정서리가 있다. 악양 면사무소를 지나 왼쪽으로 꺾어 조선시대 별장이었던 화사별서를 지나면 오른편에 깔끔하게 앉아있다. 악양이란 이름에 어울리게 볕이 낮동안 하염없이 하염없이 하늘에서 내리는 장소다. 카페지기는 울산에서 귀촌한 분이다. 입구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어야 출입할 수 있다. 그만큼 실내는 깨끗한 분위기다.
악양벌판을 바라보는 한쪽 벽면은 통창으로 꾸몄다. 계절마다 시간마다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캔버스처럼 통창에 그려지는 풍경에는 같은 장면이 없다. 물감, 캔버스, 액자를 새로 장만할 필요가 없는 가장 효율성 높은 캔버스다. 자연이 시시각각 통창의 캔버스에 무한대로 새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오직 그 순간의 장면을 감상하다 보면 태양의 기울기와 구름조각, 바람에 의해 새로운 화폭이 된다. 비가 오면 비 오는 대로, 태양이 햇살이란 붓으로, 눈 내리면 눈으로 모든 것이 캔버스에 포착된다.
얼마 전 메뉴에 없던 드립커피를 마시고부터는 커피, 그 한 모금의 매력에 엉덩이는 일어서지 못한다. 이제 당당하게 메뉴판에는 드립커피가 올라왔다. 손님들이 빙수를 찾는다길래 고가의 빙수기계도 마련했단다. 메뉴판이 점점 깨알 같은 글씨들로 채워질 것이다.
이 집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소통과 편안함이다. 차분하면서도 정갈한 분위기, 정감 있는 대화, 카페지기 인지 지인인지 모를 정도로 때론 제철 과일과 간식도 가끔 곁들여진다. 집보다도 편안(?)하다고 할까... 한 권의 책을 펼쳐 들면 시간은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고 흘러간다.
평소에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G1(최고) 등급을 선호하는데, 이 집에선 카페지기가 결정한 원두를 마시는 신선함이 있다. 오늘은 ‘페루 플루마 도라다 따비 워시드(Peru Pluma Dorada Tabi Washed)’ 품종이다. 페루의 플루마 도라다 농장에서 재배한 스페셜티(Specialty) 원두다. 중남미는 산도보다는 바디감에 무게를 두는데, 갈수록 지역의 특색이 사라진다고 한다. 이번 원두는 바디감도 있으면서 산미도 느껴진다.
그 집 만의 블랜딩 커피가 있듯이, 원두도 개량종을 통해 원하는 맛을 만들 수 있다. 산미든 바디감이든 하나의 독특한 맛을 느끼는 매력은 희석되는 셈이다. 그저 인간의 맛에 품종도 그렇게 길들여진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 한 모금만 입안에 머물러도 그 산뜻함과 깨끗한 풍미에서 차오르는 행복함은 어쩔 수 없다.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가 오랜만에 피를 마시는 전율이 이런 걸까. 오랜만에 카페인이 모세혈관 하나하나에 퍼져감을 느낀다.
2017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마스트 오브 카페’ 2025 경연대회에서 골드를 수상한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가르가리 구티티 G1 내추럴(Ethiopia Yirgacheffee Gargari Gutity G1 Natural) 드립커피 한 잔이 추가로 테이블에 놓인다. 에티오피아 남부 예가체프 지역의 가르가리 구티티 농장에서 재배한 품종이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보다 프리미엄급 풍미가 입 안 가득 담긴다. 품질 좋은 커피가 주는 기쁨이다.
에티오피아의 목동이 어느 날 염소가 빨간 열매를 먹고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이 최초의 커피 스토리 시작이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도 있다. 이슬람에 전해진 커피는 ‘커피를 몸속에 넣고 죽는 자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면서 이슬람 전역에 퍼졌고, 이슬람 음료 문화가 되었다고 한다.
봄볕이 악양에 내리면 여름볕으로 변할 만큼 악양은 햇볕이 지배하는 지역이다. 그 악양의 한 자락에 카페 정서리가 있다. 악양 벌판을 통창으로 내다볼 수 있는 은은한 장소다. 스페셜티 커피, 한 모금이 입안에 담기는 순간부터, 행복감이 심장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에티오피아 시바 여왕이 예루살렘 솔로몬 왕에게까지 선물로 가져갔다는 커피는 중동과 유럽을 거쳐 한국까지 왔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은 커피, 한 모금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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