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중순이 지난 봄날이지만 산골은 아직 겨울이 봄을 조금만 허락하고 있다. 길가 담장에선 봄을 맞이한다는 뜻인 영춘화(迎春花)가 회초리같이 늘어선 가지에 노란 꽃을 달았다. 잎을 내어 광합성을 하기보다 서둘러 꽃이 봄소식을 알린다. 계곡 옆에 핀 생강나무 꽃도 무채색 가지에서 작은 꽃다발처럼 노란 꽃이 앙증맞게 피었다.
이웃 구례의 산수유 마을은 온 천지를 영원히 노랗게 물들일 것처럼 잎도 없이 노란 꽃들이 만개했다. 길가의 개나리도 연한 줄기에 나팔 같은 노란 꽃들이 종처럼 봄이 왔다고 단체로 울려댄다. 복수초는 꽃말인 봄의 전령답게 겨울 언 땅에서 노랗게 피어났다. 아직 산골은 겨울을 놓아주지 않지만 기어이 희망찬 봄이 왔다고 잎보다 먼저 꽃들이 먼저 일어났다.
사람의 눈에는 아름답게 보이는 봄꽃들이지만, 꽃의 입장에선 생존을 위한 최적의 선택이다. 다른 종들과 같이 잎을 내고 꽃을 내다가는 생존경쟁에서 뒤처진다. 겨울은 여름에 비해 광합성 양이 적어 몸속에 보존한 에너지도 적다. 가을에 잎을 털어버리는 것도 에너지가 부족한 겨울 동안 생존하기 위한 포기다.
지난해 11월 마을에서 관리중인 지리산 반달곰도 3개월 동안 동면에 들어갔었다. 겨울은 최소한의 에너지로 버텨야 한다. 11월 중순이 되면 반달곰 사육장에 짚을 가득 넣어둔다. 반달곰이 겨울 동면을 한 짚단의 모양을 보면 새둥지처럼 동그랗게 파여있는 보금자리를 만드는데, 이를 ‘탱이’라고 한다. 3개월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아 배뇨와 배변도 없다. 체온과 심박, 호흡수도 떨어뜨려 최소한의 에너지로 겨울을 버틴다.
봄이 되면 유독 노란꽃들이 많이 보인다. 복수초, 영춘화, 생강나무 꽃, 산수유, 개나리 등 노란색이 봄을 대표하는 듯하다. 노란색은 식물들이 에너지를 적게 들이고도 만들어내기 쉬운 색깔이라고 한다. 겨울 동안 버틴 식물은 이른 봄엔 영양분이 부족하다. 식물의 입장에서 최소한의 에너지로 만들 수 있는 색깔이 노란색이다. 노란색 꽃을 우선 곤충에게 노출시켜 번식을 하는 선택을 한다고 한다.
꽃의 수술과 암술도 대부분 노란색이다. 봄이면 자동차 표면이 온통 노란 송홧가루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소나무 입장에선 최소한의 에너지로 최대한의 효율을 올릴 수 있는 노란색 송홧가루를 분분히 날리는 게 생존에 있어서 최선의 선택일 뿐이다. 사람의 눈에는 노란색이 좋게 보이는 것도 식물 입장에선 긴 겨울을 버틴 후 살기 위한 최적의 선택이다.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전략가, 잡초』는 잡초가 생존하기 위해 기발한 역발상으로 생존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는 다른 책 『재미있어서 밤새 읽는 식물학 이야기』에서 초봄에는 노란색 꽃이 피는 이유가 벌과 비슷하지만 파리에 가까운 곤충인 등에가 좋아하는 색이라고 한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생존이 최우선 과제다. 사람의 모든 생리현상과 병이 드는 것도 생존을 위해 몸이 최적으로 대응하는 유기체다. 그냥 보면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지나가지만, 자세히 보면 궁금한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아는 것 보다는 모르는 것투성이다. 증명된 과학도 다른 증거에 의해 뒤바뀌기도 한다.
식물도 자세히 보면 그저 신비롭다. 생명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바위 표면에서 살아가는 이끼, 수백 년 된 나무는 생명체의 보고다. 각종 곤충이 살아가는 작은 코스모스가 나무에 깃들어 있다. 사람 몸 역시 하나의 우주처럼 미세한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코스모스는 당연히 모르거니와 제 몸속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게 얼마나 교만한 말인가...
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부분들이 과학이 발달하면서 하나둘씩 인간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 포함되고 있다. 고대 천둥과 번개는 신의 노여움이라 여겼지만, 현재는 구름과 구름, 구름과 지표면 사이의 공중 전기의 방전인 기상현상 중 하나로 인식한다. 여전히 사람은 모르는 영역이 너무 많다. 우주의 암흑물질처럼 깜깜한 무지의 상태가 인간이다. 신의 어리석음이 인간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는 말이 여전히 유효하게 다가온다.
산골 마을 곳곳에 노란색 봄의 물결이 일렁이는 만큼, 도시에서 들어오는 사람도 많다. 노란색 꽃 물결이 나비 날개처럼 번져나가 도시민을 흔들어 댄다.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한 달 동안은 산골이 와글와글 할 것이다. 생존을 위해 쌓였던 도시 스트레스를 시골의 꽃축제를 통해 해소할 것이다. 시골은 이들이 분주히 오가는 이 시기가 1년 중 가장 중요한 시기다. 1년을 생존하기 위한 수입의 대부분이 이 기간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봄 꽃들도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에너지로 노란 꽃을 피운다. 마을의 반달곰은 호흡과 맥박수까지 떨어뜨리면서 겨울을 버틴다. 시골 사람들도 화사한 봄꽃 축제기간을 위해 긴긴 겨울을 버틴다. 도시인은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 해소를 봄꽃 축제를 통해 버틴다. 모든 지구상의 숨 쉬는 동식물은 생존을 위해 각자 최적의 선택을 한다.
인간의 잣대로 옳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인간이 지구상의 최상의 포식자가 되기 위해 욕심을 부리는 건 다양성을 죽이는 행위다. 다양한 생물종이 공존해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된다. 독식은 자신에게 독으로 돌아온다는 건 역사가 증명한다.
사방이 봄 꽃들로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도 봄 꽃처럼 서로에게 행복과 웃음을 주는 그런 개인 개인들이 되었으면 희망한다. 개나리의 꽃말이 희망이듯 내가 누군가의 개나리 꽃이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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