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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영도 예찬

일기/산골일기(하동 의신마을)

by 풀꽃처럼 2025. 5. 13.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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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도시(15-minute city)란 도보나 자전거, 대중교통을 이용해 15분 이내에 일상적인 필수 서비스(직장, 쇼핑, 의료, 여가 등)를 이용가능한 도시 계획 개념이다. 도시민이 자가용에 의존하지 않고 행복을 누리기 위한 개념으로 2020년 프랑스 시장이 주장했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백양산 자락 부암동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며 청소년 시절까지 보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잠깐 외지에서 2년 동안 지냈다. 2년 후 다시 부산으로 복귀하면서 온천장 인근에서 26년 정도를 지냈다. 바닷가인 해운대나 송정은 어릴 때 잠깐 다녔다. 부산의 구도심인 광복동, 송도 등은 주거지와 멀어서 거의 가지 않았다.

고신대에서 바라본 오륙도

부산의 내륙인 서면과 온천장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곳임을 영도에 살면서 알았다. 봉래산을 중심으로 현해탄을 바라보는 동삼동이 부산에서 살기 좋은 곳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더운 여름엔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뒷 베란다를 통해 바다 쪽으로 불어댄다. 밤엔 바다에서 앞 베란다로 파도소리와 함께 바닷바람이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에어컨을 켜는 날은 아예 없거나 1주일 정도면 된다.

6번 버스가 가파른 길로 내려가고 있다

영도는 절영도(絶影島)에서 유래했다. 영도는 옛날부터 말 사육지로 목도(牧島)라고 불렸다. 말이 너무 빨라 그림자가 따라가지 못하고 끊어진다는 절영(絶影)이란 뜻으로 절영도로 불렸다. 1951년 행정편의상 ‘절’ 자를 빼고 ‘영도’로 부르기 시작했다.
 
영도가 주 생활권이 되면서 부산의 구도심인 광복동, 송도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부산하면 무엇보다도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의 애환이 남아있는 산복도로다. 전국 어디에도 없는 부산만의 특징이 산복도로이지 않을까. 동구 도서관 맞은편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구축한 일본왜성이 남아있다.

오륙도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중

하루의 루틴은 새벽 조깅으로 시작한다. 국립 해양대학교와 국립해양박물관을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오륙도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계절 따라 지구의 기울기가 달라지며 해가 바다 위에서 솟는 위치가 다르다. 겨울로 갈수록 오른쪽으로 여름이 가까울수록 다시 왼쪽으로 옮겨 떠오른다. 부산 국제크루즈터미널을 돌아 언덕을 오를 때는 심장이 터질듯하지만 이내 평지를 접하면서 클라이맥스를 경험한다. 비가 오지 않는 한 9km를 55분 정도 속도로 땀과 함께 시작한다.
 
영도 동삼동에서 영도 도서관까지는 걸어서 15분 이내면 갈 수 있다. 영도 도서관은 열람실에서 책을 펼치면 정면으로 바다가 보인다. 책을 보다가 고개를 들면 바다는 매일 매시간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에 지루하지 않다.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도서관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봉래산 둘레길을 이용한다. 10분이면 숲 속으로 난 오솔길 속에서 새소리와 바람, 차분히 가라앉는 공기로 흙의 감촉을 느끼며 동백숲을 지나 집으로 돌아온다. 둘레길에 숨어 있던 동백숲은 절정기에는 온통 바닥이 핏빛으로 물든 장관이 된다.

봉래산 둘레길
수평선 위로 대마도가 보인다

동삼동에서 출발하여 봉래산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은 2시간이면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다. 편백숲을 통과하는 구간, 약간의 가파른 길, 북항, 남항, 자갈치, 오륙도 등 부산의 대표적인 명소도 모두 볼 수 있다. 날이 좋으면 현해탄 건너 일본 대마도가 선명하게 보인다. 일출과 일몰을 베란다에서 모두 볼 수 있다. 계절마다 달리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 종류에 따라 수평선에 늘어선 야간 불빛 행렬도 장관이다.

고깃배들이 만선을 꿈꾸며 밤을 밝힌다

도서관 옆에는 영도문화예술회관이 있다. 수시로 열리는 공연과 전시회는 가성비도 좋다. 집으로 돌아오며 느끼는 밤공기를 마시며 공연의 여운을 즐긴다. 거실에서 고개만 돌려도 보이는 바다는 언제나 같은 파도와 색감이 아니다. 바람이 부는 날은 바다가 흰 물감으로 점점이 찍은 듯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 된다. 가까이서 내려다보면 먼 곳의 점 같은 파도가 해안에서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는 파도가 된다. 창문을 열면 벼락같은 파도소리가 가슴으로 들어온다.

저녁 산책길 야경

저녁 먹고 20분 정도 산책길을 걷다 보면 흰여울문화마을에 닿는다. 해안선을 따라 난 데크길을 걸으면서 바다에 정박 중인 배들을 본다. 돌아올 즈음에는 바다가 짙어지면서 하나 둘 켜지는 선박의 불들과 남항대교 경관조명은 덤이다. 굳이 태종대를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살기 좋은 곳이다.
 
걸어서 접근가능한 도서관, 가성비 좋은 문화예술회관, 체육센터, 봉래산 둘레길, 해안 산책도로, 새벽에 적당한 내리막과 오르막이 있는 조깅 코스, 군데군데 위치한 카페에서 책 읽기, 자그마한 맛집들. 시골은 사시사철 다른 풍경 속에서 지낼 수 있어 좋은 곳이지만 나이가 들어 도시로 옮길 때면, 영도가 그나마 최적의 선택지가 아닐까 한다.

비가 점점 해안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

서재 겸 방에서 책을 읽다 고개를 돌리면 정박한 배들이 보인다. 겨울이면 윤슬이 눈을 간질인다. 더 추운 겨울이면 바다도 추위를 견디지 못해 차가운 입김을 뿜어댄다. 여름이면 저 멀리 짙은 구름에서 내리는 빗줄기가 점점 가까이 오면서 창가를 때리는 순간까지 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바다는 에메랄드 빛이었다가 일렁이는 높은 파도가 되는 조화를 부린다. 하늘의 구름도 바람과 해의 위치에 따라 제각각 다른 그림을 연출한다.
 
나는 영도가 좋다. 새벽부터 자정, 잠든 순간까지 파도소리가 온몸을 훑어대는 영도가 좋다. 젊은 시절 부산 내륙에 살아서 알지 못했다. 영도는 낡은 도시다. 낡아서 좋다. 부산의 구도심은 현대와 근대를 누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다. 외국을 여행할 때마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거리를 걸을 때의 그 기분처럼 영도는 매력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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