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다. 한 해를 돌아본다. 어떤 책들을 읽었는지 경로를 짚어 본다. 2025년에는 198권을 읽었다. 늘 권 수에 상관없이 좋은 책을 읽자고 다짐하는데 눈에 보이는 권 수에 붙잡힌다. 인문 41권, 에세이 28권, 소설 29권, 과학 23권, 정치·사회 19권, 역사·문화 16권, 예술·대중문화 14권, 기타(경제·경영, 자기계발, 기술공학 등) 28권 읽었다.


최근 5년간 추이를 살펴본다. 인문은 변함없이 제일 많이 읽었다. 에세이도 꾸준하게 읽었다. 소설이 점점 늘어났다. 유튜브에 소개되는 책들을 읽다 보니 소설이 자꾸 노출된 영향이 있을 듯 추정한다. 역사·문화도 꾸준했다. 과학책은 과거에는 잘 읽히지 않았는데 지금은 사물의 명확한 원리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인문서의 장점이 사고를 깊게 하지만 저마다의 생각들이 파편적인 반면, 과학서는 법칙에 근거한다. 새로운 법칙이 과거의 것을 대체한다.
예술·대중문화는 점점 예측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AI시대로 접어들면서 손에 잡히는 책들이다. 알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관습을 혁파하는 도구가 예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보다 미술 등 전시회와 공연을 많이 본다. 예술은 평범한 일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운다. 나이가 들어 여행을 못 갈 경우 인근 미술관이나 공연, 그리고 책들이 발을 대신할 것이다. 지금 예술을 자주 자세히 보아야 할 이유다.
가장 큰 변화는 종교 책의 몰락이다. 2021년 한 해 51권을 읽었다. 2022년에는 전년의 절반인 27권에서 2025년에는 1권으로 추락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풀어내는 방법이 성경을 절대 진리로 기준점을 세워두고 접근한다. 성경 텍스트에 대한 의문을 조금도 가지지 않는 게 의문이었다. 성경은 원본이 없다. 고대 필사본들의 집합이다. 한국에 유입된 미국 개신교 근본 복음주의가 현재 트럼프를 지지하고, 한국에서 벌어지는 개신교의 권력화, 사유화도 무시 못하게 작용했다.
인문서 중에서는 계엄을 보는 시선에 따라 극명하게 갈리는 파시즘적 현상을 보며, 귀스타브 롱의 『현명한 존재는 무리에 섞이지 않는다. 군중심리』가 기억에 남는다.
'편협하고 권위적인 군중은 자신들과 유사한 모습을 지닌 지도자를 선호한다. 그래서 군중은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폭군을 섬길지언정 어진 지도자에 충성하지 않는다.'
'군중은 약한 권력에는 언제나 대항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강한 권력에는 비굴하게 머리를 숙인다.'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는 강한 자들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감염된 사회다. 인간이란 동물의 실체다. 지긋지긋하다. 강한 자는 그 사회에서, 약한 자는 또 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군중은 자신들이 따르는 신념과 지도자에게 맹목적인 순종을 바치고, 자신들의 믿음에 동조하지 않는 이를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인다. 군중의 이러한 행위는 종교적 감성에서 비롯되기에 그들이 따르는 지도자는 신의 권위를 부여받는다.'
'많은 철학자들이 과학과 자연의 힘을 드러내 보이며 군중의 케케묵은 환상을 깨뜨리려 하지만, 군중은 진실보다는 거짓과 오류로 점철된 환상을 좇는다. 환상 속에서만이 꿈꿀 수 있고 희망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군중을 각성시키려는 자는 실패하고 군중을 현혹하는 자는 성공을 거두는 법이다.'
강남순,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도 재미있게 읽었다. 강남순 저자의 신간은 언제나 읽고 구입해야 할 상위 리스트다. 한국인에게 뼛속 깊이 각인되어 몰랐었을 관습들을 끄집어내어 리셋시켜 준다.
'학기 중에 나는 거의 영어를 사용한다. 내가 일하는 대학교에 한국 학생 수가 매우 적어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전화 또는 이메일로 한국인과 소통하게 되면 한국어가 지닌 위계적 언어구조를 느끼게 된다. 존댓말 또는 반말만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호칭을 정해야 하는 한국어는 언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유방식도 바꾸며 쉽게 위계를 설정한다. 이런 방식은 서로를 평등하고 개방적으로 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언어와 소통방식 자체가 불필요한 거리감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 가르치는 대학에서 2006년부터 일했다. 그렇지만 동료들은 서로의 생물학적 나이를 모른다. 이 대학에서 전임교수로 가르치면서, 생물학적 나이에 대한 개인적 관심을 서로 표현하는 사람을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했고, 나 역시 관심이 없다. 학교 내에서 학장 또는 총장으로 서로를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소통한다. 그래서 교수회의나 다양한 위원회의 회의를 할 때, 무슨 선배 교수 또는 후배 교수라는 연배 의식으로 소통하는 경우가 없다. 적어도 이러한 탈위계적 관계 형성을 통해서,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는 민주적 토론과 비판적 문제 제기가 가능한 공간이 확보된다.'
'나는 학생이든, 동료든 또는 이런저런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든, 그들의 젊음 여부를 나름대로 정하는 정신의 나이에 관심이 많다. 그 사람이 타자에 대하여, 사물에 대하여 좀 더 알고자 하는 지순한 호기심과 열정을 지니고 있는가, 새로운 앎이나 의미 추구에 대한 '실존적 배고픔'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앞마당에 있는 나무를 밑동만 남겨놓고 모두 잘라버린 적이 있다. 이제 그 나무는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두 달 반 정도 지나니 놀랍게도 가지가 자라고 소담한 꽃까지 피우는 게 아닌가. 이 나무를 보면서 우리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 살다 보면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고, 밑동까지 잘려 나간 나무처럼 아무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조금씩 자라 가지를 뻗치고, 꽃을 피우는 것처럼, 다 끝난 것 같은 우리 삶에 예상하지 않았던 '꽃'을 피워낼 수 있다.'
다른 인문서로는 김진해의 『쓰는 몸으로 살기』, 박웅현의 시 강독집 『천천히 다정하게』가 떠오른다.
에세이 책은 노부부가 집도 처분하고 세계여행을 했던 린마틴의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를 다시 읽었다.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 무소유 정신으로 미니멀리스트 삶을 추구하며 사람을 사랑했고 죽음도 따뜻하게 포옹했던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소설은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 비참한 수용소의 하루 동안 인간군상 속에서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이란 희망의 씨앗을 심었던 알레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마지막 부분에 거대한 폭죽처럼 사건을 팡팡 터트렸던 이렌 네미롭스키의 『뜨거운 피』, 격변하는 역사의 현장과 한 여자를 향한 숭고한 사랑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가며 피날레로 예술작품을 비튼 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그녀를 지키다』, 성해나의 『혼모노』, 『두고 온 여름』, 옛날 한 번 읽고 재활용 쓰레기로 버렸던 책인데 다시 집어 들고 읽은 책인 김훈의 『칼의 노래』. 문장들이 사실만을 나열해도 독특한 매력을 느끼며 이렇게 글을 쓰고 싶었던 책이다.
과학 책은 리사 펠트먼의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싸우는 식물』. 정치·사회 책은 사울 알비드레스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제임스 데이비스의 『정신병을 팝니다』, 태지원의 『평범한 말들의 편 가르기, 차별의 말들』. 역사·문화 책은 대만 한달살이 동안 기본 텍스트가 되어 다른 부분까지 지식을 확장하고, 현재 대만에 대한 이해를 높였던 우리룽의 『드디어 만나는 대만사 수업』, 히가 스스무의 『오키나와』는 제주도처럼 아름답지만 역사적 비극을 간직한 섬이었다. 이상각의 『조선팔천, 나도 사람이 되고 싶다』에서 기득권 세력의 허상을 까발린 사건들이 기억에 남는다. 예술·대중문화 책은 릭 루빈의 『창조적 행위 : 존재의 방식』, 마부치 아키코의 『자포니슴』 등 언제나 새로운 시선으로 자기 만의 세계를 여는 예술에 끌린다. 기타 책은 류자키 쇼코의 『크리에이티브 점프』, 오스틴 클레온의 『훔쳐라, 아티스트처럼』, 애덤 그랜트의 『히든 포텐셜』 등이다.
읽었던 책 제목을 훑어보는 것으로 한 해를 되돌아본다. 올해는 소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과학이나 인문에선 한 줄로 표현하는 문장을 소설은 두루두루 헤쳐 모여 혈관을 흐르게 한 후 문장에 직접 닿게 한다. 내가 읽는 모든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읽는 것은 혼자인 나와 뇌 속의 또 다른 나, 책을 쓴 저자의 문장으로 구성된 세 명이 모여 읽으면서 생각하고 질문하고, 동의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뇌를 말랑말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쓰레기 음식을 먹으면 쓰레기 몸이 된다. 책도 마찬가지다. 일단 마음이란 백지상태의 병 속에 처음 들어온 것이 자리 잡으면 좀처럼 바꾸지 않으려 하는 게 사람의 속성(실제는 뇌지만)이다. 그 단단한 고집이란 바위에 균열을 일으키는 게 책이다. 내가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혼자 있으면서도 세 사람이 대화하는 듯한 느낌, 한 곳에 앉아 있지만 우주를 여행하는 느낌, 올해도 거쳐갔던 많은 책들이 고맙고 그 책들로 인해 관계를 형성했던 사람에게 고맙습니다.
1. 알레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2.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그녀를 지키다』
3. 제임스 데이비스, 『정신병을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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