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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행복은 짙은 빨강

일기/유유적적(裕裕寂寂)

by 풀꽃처럼 2026. 10. 12.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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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북촌 코스모스 축제장 체험 부스. 열을 가하면 크기가 줄어드는 플라스틱 종이(슈링클스)에 ‘걸음걸음이 행복입니다’란 문장을 쓸 때, 행복이란 글자를 무슨 색으로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잠깐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젓는다. 나 역시 생각해도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큐링클스로 만든 키링

화개면의 왕성 초등학교 3학년 회장(3학년이 1명뿐인)에게 물어봤다. 행복은 빨강, 그것도 짙은 빨강이라고 한다. 이유는 모르겠단다. 아이들의 뇌는 어른들보다 역시 말랑말랑하다. 은유적이다. 놀랍다. 뇌 속의 무수한 신경망이 어른보다 더 느슨한 아이들의 특징이다.

 

도시를 상징하는 색은 회색이다. 밤이면 번쩍이는 네온사인으로 화려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 내면은 삭막한 색을 감추고 있다. 회색은 생명을 뿜어내기보다는 사그라드는 색에 가깝다. 아궁이에서 장작을 벌겋게 달군 후 바닥에 가라앉은 색이다. 생명을 다한 인간도 화장을 마친 뒤 밝은 회색의 뼛가루만 남는다.

 

도시는 하루하루 치열하게 사람과 부대끼며 날 선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다. 사람 간의 밀도가 낮은 산골에서 자연을 바라본다. 자연의 밀도가 짙은 곳에선 사람은 자연의 지극히 작은 존재다. 겨울의 회색을 지나 여름의 싱그런 녹음은 생명이 출렁인다. 도시에선 사람이 주인공이지만 자연에선 사람은 관찰 대상이다. 자연이 사람을 관찰한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사람을 원숭이들이 관람하는 상황이랄까.

 

산골의 숲은 녹색이지만 생명이 꿈틀대는 붉은 느낌이 든다. 생명은 빨간색이다. 사람은 붉은 몸으로 세상에 등장한다. 별도 그 속에는 붉은 용암으로 꿈틀댄다. 사람의 피도 붉은색이다. 사람도 하나의 별 조각이다. 모든 사람은 별에서 왔기 때문이다. 생명의 상징인 심장도 붉은색이다. 죽은 사자보다는 살아있는 개가 행복하다. 살아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행복은 붉은색이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붉은색(紅)은 행운과 번영, 기쁨의 상징이다. 중국어에서 ‘홍(红, hóng)’은 ‘인기가 많다’, ‘잘 나간다’, ‘성공했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왕홍(网红, wǎnghóng)은 SNS상에서 인기가 있는 인플루언스, 홍런(红人, hóngrén)은 인기 있는 사람, 홍빠오(红包 , hóngbāo)는 세뱃돈이나 축의금, 홍치라이(红起来, hóngqǐlái)는 인기를 얻기 시작하다, 유명해 지다라는 뜻이다.

 

일본에선 매년 12월 31일 NHK에서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戦)을 방영한다. 홍백(紅白)의 빨간색은 대표적인 축하의 상징이다. 붉은색은 출생과 생명력을 의미한다. 코우간(紅顔, こうがん)은 혈색이 좋은 얼굴을 뜻한다. 코우우(紅雨, こうう)는 붉은 꽃 위로 촉촉이 내리는 비를 나타낸다.

 

한국어에서 홍운(紅運)은 좋은 운수, 좋은 기운을 뜻한다. 홍일점(紅一點)은 남성 가운데 유일한 여성을 말하며 주인공 대접을 받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홍사(紅絲)는 전통 혼례에서 신랑 신부의 인연을 엮어주는 붉은 실로 사랑과 결혼의 행복을 나타낸다.

 

영어에서 a red-letter day는 아주 행복하고 기억에 남는 날로, 개인적으로 시험에 합격한 날이나 결혼 등 인생의 경사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 red-carpet treatment는 귀빈 대접을 의미하며 국빈이나 귀빈을 맞이할 때는 레드 카펫(red carpet)을 깐다.

 

산골은 10월 말이면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채워진다. 짙은 녹음에 숨어있던 붉은 생명의 기운이 잎을 통해 가을을 불태운다. 불멍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듯 붉은 단풍도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지리산 주 능선은 10월 초인데도 단풍이 아름답게 내렸다고 한다.

 

태양도 항상 타오르는 붉은 덩어리다. 거기에서 발산하는 빛이 지구에 도달해서 사람의 몸속을 흐르는 피도 붉은색인지도 모르겠다. 빨간색을 보면 인간의 자율신경계가 자극되어 맥박이 미세하게 빨라지고 체온이 상승한다는 뇌과학의 연구 결과도 있다. 붉은색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행복한 색이다.

 

행복은 원두 향에서도, 드립 할 때 분쇄된 원두 입자가 부풀어 오르는 모습에서도, 갓 내린 커피 한 모금에서도 느낄 수 있다. 한눈에 반한 이성을 마주쳤을 때 심장의 쿵쾅거림에서도, 치열한 노력 끝에 목표를 이루어 환호성을 지를 때처럼 행복은 잔잔하게도 격하게도 다가온다.

 

삶이 지루하고 무채색으로 느껴진다면 일상에 의도적으로 빨간색을 한 방울 떨어뜨려 보자. 햇볕을 쬐어보거나, 가까운 자연을 걸어보거나. 빨간 옷을 입어보거나. 이러한 행동은 가라앉으려는 당신의 감각을 깨우고, 멈춰 있던 심장을 뛰게 하며, 삶을 다시 뜨겁게 ‘붉어지게(红起来)’ 만들지도 모른다. 빨강은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행복의 신호다.

생명의 원천인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의 색은 붉다. 어둠을 몰아내는 색이다. 태양을 본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살아있음이 행복이다. 개울 건너 맞은편 산 능선에선 붉은 단풍이 내려올 것이다. 녹색에 숨어있던 빨간색이 해방된다. 높고 깨끗한 푸른 하늘과 어울리는 시기다. 능선 뒤로 가을 구름이 점점이 밀려온다. 심장이 요동친다. 가을이다. 붉다.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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