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하여금 모름지기 이를 잊지 않고 바다에서 있을 때처럼 한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어떤 물건이든 내가 즐기지 못할 것이 없고, 어떤 일이든 내가 즐기지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에 마소를 먹일 꼴을 입에 물고서라도 맛있는 고량진미가 들어 있는 듯합니다. 땔나무를 지고 절구 찧는 힘든 일을 떠맡고서라도 부귀의 즐거움이 들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장한철, <표해록> 中
제주올레 15-B코스 걷던 중 우연히 장한철 생가를 발견하고, 그가 서울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중 풍랑을 만나 표류기를 썼다는 기록을 보고 읽은 책이다. 애월 해안의 카페거리에 그의 생가가 있어 찾기는 어렵지 않다.
장한철은 1770년 가을 제주 향시에서 수석을 한 후, 서울 예조에서 치르는 회시에 응시하기 위해 그 해 12월 25일 제주를 떠났다. 중도에 풍랑을 만나 완도에 정박할려 했지만 실패하고 12월 28일 오키나와의 한 섬에 도착한다. 1771년 1월 1일 왜구를 만나 가진 것을 털리고, 월남 상선에 구조되지만 상선에서 추방되어 표류하다 1월 6일 청산도에 상륙한다.
지금의 청산도는 산이 숲처럼 되어 있지만, 당시 그의 서술에 의하면, 청산도는 산이 벌거벗어 짐승이 없다. 들에 수풀이 없어 꿩도 없다. 논은 비옥하고 해산물도 많다고 진술한 것이 흥미롭다.
출항할 당시 29명이었지만 최종 8명만 생존한다. 1771년 1월 9일 서울에 시험을 치르기 위해 출발했지만 3월 3일 낙방한 후 5월 8일 제주에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표류하는 과정과 왜구를 만났을 때, 월남 상선에 의해 구조되었을 때의 과정이 소설처럼 박진감 넘치게 읽힌다. 사실인지 소설인지 고개를 갸우뚱 할 정도로 허구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돌아온 자의 달관한 경지는 고통이 인간을 한층 겸손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것을 확인한다.
재목이 될 나무는 먼저 벌채되고, 향이 될 나무는 먼저 향로 불에 태워진다. 물건의 재앙은 재목이 되는 데에서 생겨나고, 사람이 재앙은 지혜로운 데에서 생겨난다.
인생이란게 대로라고 해서 기뻐해야 할 이유도, 가시밭 길이라고 슬퍼하기 보단 인생이란 파도 속으로 담담히 걸어들어가는 무욕의 훈계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표해문학의 특성상 체험자의 서술과 고통이 오롯이 전해진다. 기행문이되 죽음까지 맛보고 나온 경험이 절박하고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어 술술 익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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