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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늙음 예습

일기/산골일기(하동 의신마을)

by 풀꽃처럼 2024. 8. 8.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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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 기한으로 경로당 관련 업무를 6개월째 하고 있다. 지자체에서 각 경로당별로 지원하는 보조금 회계처리에 어려움이 있는 곳을 방문해 도움을 주고 있다. 평소에는 만날 수 없었던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배우기도, 경계를 하기도 한다. 늙어가면서 먼저 살았던 사람들을 곁에서 살피는 것은 인생학교에서 예습하는 기분이다. 경로당 회원가입은 법적 노인인 65세 이상이지만 대부분 70대가 훌쩍 넘어야 경로당을 출입한다. 70대 초반까지는 경로당에서 젊은 축에 속하기에 잔심부름을 하기 때문이다. 업무 특성상 경로당 임원을 만나기 때문에 대부분 70대 중반을 넘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장면1. 80대 중후반이면서도 경로당 회장을 맡고 있는 한 분은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구두방으로 직업을 시작했다. 자리가 잡히면서 사진에 취미를 가졌고, 차츰 전문 장비를 갖추면서 전국과 세계를 누비며 작품 활동을 했다. 전국 사진대전에 응모했지만 17년 동안 떨어졌고, 18년째 입선했다. 틈틈이 시와 수필도 썼고 등단했다. 경로당에 찾아가면 건강한 모습과 활기찬 모습에 좋은 영향을 받는다. 그는 안식일 교회 장로다. 어르신이라 하지 않고 ‘그’라고 칭한 것은 만날 때마다 뿜어내는 젊은 기운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겸손으로 사람을 대하는 모습과 어린애 같은 파안대소에 만날수록 긍정적인 기운을 받는 선배시민이다.
 
장면2. 80대 초반인 한 경로당 회장은 오전 10시면 하동읍 복지관 헬스클럽에서 꾸준히 운동한다. 노인 복지관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점심 먹고, 오후 4시가 되어서야 귀가한다. 노인회 총회에서는 쩌렁쩌렁하게 노인회의 문제를 제기한다. 지역 분회에 납부하는 회비는 경로당별 보조금의 평균 10~17%를 차지하는데 왜 일절 혜택이 돌아오지 않는지 질의한다(경로당의 보조금 대부분은 식비로 지출한다). 그 돈의 일부가 대한노인회에도 들어가는데 왜 혜택이 없느냐고 따진다. 이에 대해 분회 회장은 규정상 회비를 받는다며 회칙대로 집행했기에 문제가 없다고만 답변한다. 묻는 의도와는 다르게 원칙으로만 답변하니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다. 경로당 보조금 내역 집행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언급하지만, 다른 경로당 회장들은 대응을 하지 못한다. 늙어도 현상을 제대로 직시하는 그분의 시선과 개인에게는 자상하게 대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모습이 보기 좋다.
 
장면3. 면사무소 공무원들과 함께 한 경로당의 점심 초대를 받았다. 점심을 준비하느라 여자들은 부엌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남자들은 가만히 방에만 앉아 있다. 테이블에는 남자 노인들과 공무원들이 앉고, 여자 노인들은 좌식상에 둘러앉아 먹는 전형적인 옛날 음식문화 풍습이다. 일은 일대로 준비하고 겸상도 못했던 여자 일생의 신산함에 미안한 감정으로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남자 노인들은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면장에게 요구한다. 소화할 여유도 없이 요구사항을 들이민다. 위 속에 들어간 음식물이 소화액으로 샤워하기 이전에 스트레스 유발 호르몬이 먼저 나온다. 이건 아닌데...

노인 강령

1982년 대한노인회 정기총회에서 의결한 노인강령 전문은 ‘우리는 사회의 어른으로서 항상 젊은이들에게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지니는 동시에 지난날 우리가 체험한 고귀한 경험업적, 그리고 민족의 얼을 후손들에게 계승할 전수자로서…’로 각종 행사때마다 되뇌는 구호다. 노인강령 1항은 ‘우리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존경받는 노인이 되도록 노력한다’고 되어있다. 노인은 ‘사회의 어른’으로 ‘솔선수범’ 자세를 견지하여 ‘존경받는’ 대상이 되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경우들을 많이 본다.
 
소박하지만 정성이 깃든 식사에 초대했다면 화목하게 식사를 한 후 덕담을 나누며 마무리 짓는 것이 좋다. 이후 경로당 임원진과 이장이 면사무소를 방문해 어떻게 하면 마을이 이전보다 나아질 수 있을지, 노인회에서 어떻게 도와야 할지, 서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논의했다면 훨씬 아름다운 식사초대가 되지 않았을까.
 
장면4. 경로당을 방문하면 99%는 환대한다. 작은 도움이라도 고마워하며 뭐든 손대접하려 해서 늘 손사래 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U턴한 어르신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아침이면 읍내까지 100원 버스를 타고 이동해 파크골프를 친 후 점심을 먹고 귀가한다. 인근 구례장에서 닭을 사서 키우고 있다. 무한한 시간을 그냥 보내기보다는 닭 모이주기, 닭장 청소, 저녁 닭장 문 닫기 등 자유로운 시간에 규칙적으로 해야 할 일을 개입시켜 무료하게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으려 한다. 시간에 둑을 세워 시간을 통제한다.
 
우주도 지구도 사람도 에너지로 움직인다. 에너지가 순환해야 살 수 있다. 에너지를 순환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죽는다. 에너지가 흐르지 않으면 사람은 흙으로 원자로 돌아간다. 에너지를 순환시키지 못한 스티브 잡스는 흙으로 돌아갔다. 미꾸라지를 튼튼하고 건강하게 키우려면 일정량의 메기를 연못에 풀어야 한다. 신선도가 생명인 청어를 싱싱하게 운반하기 위해 어창에 메기 한 마리를 풀어야 청어의 활동성이 높아져 싱싱한 상태로 항구까지 배달할 수 있다.

노년기 인생에도 한 마리 메기를 풀어놓어야 한다. 무료한 시간에 닭을 키우든, 사진에 열중하든, 헬스클럽, 봉사활동이든 인생이라는 수조에 메기는 필요하다. 퇴직 후 무한한 자유시간은 자유를 갈구했던 인간에겐 무한한 고문으로 돌아온다. 직장생활은 짜놓은 시간에 틈이 없을 정도로 욱여넣었던 수동적 삶이 시간에 치여 스트레스로 가득한 시간이었다면, 퇴직 후의 풀어놓은 시간은 무료함에 질식하는 시간이다. 구속되어도 자유로워도 피곤한 게 인생이다. 평균수명 80세를 훌쩍 넘은 시대에 어떻게 하면 무료함 없이 노년을 보낼 수 있을까? 나를 자극할 메기를 어떻게 풀어놓아야 할까? 메기 한 마리만큼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자기만을 돌보던 시간에서 사회의 선배시민으로 최소한 비난을 받지 않도록 노인강령을 떠올리며 여유(與猶)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 여유(與猶) :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온 말로, “신중하기(與)는 겨울에 내를 건너는 듯하고, 삼가기(猶)는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는 뜻. 여유당(與猶堂)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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