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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12일째 1코스, 밀밭에서 흔들리는 호기심을 보다

올레길

by 풀꽃처럼 2021. 5. 1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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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11(화)
1코스 15.1km. 시흥리 정류장 ~ 말미오름 ~ 알오름 ~ 종달리 해안도로 ~ 성산일출봉 ~ 광치기 해변

<말미오름 입구 간새 표식>

어제 하루, 연일 행군한 두다리에 휴식을 주었더니 거의 회복되었다. 오후 1시부터 서귀포와 성산쪽에 비가 예보되어, 일단 먼거리인 서귀포 8코스를 오전만 걷기로 하고 성산에서 서귀포행 직행을 탔다. 서귀포에 가까이오자 비가 오더니 내렸을땐 걷기가 힘든 상황이라, 다시 성산쪽으로 버스를 갈아탔다. 일기예보가 아니라 일기중계가 되어버린 오늘의 날씨덕분에, 원치 않는 직행을 왕복으로 쉼없이 즐긴 꼴이 되었다.

아침에 왕복 2시간 30분을 헛걸음 했다. 주말에 가까운 곳을 가기위해 저축해 두었던 1코스로 변경해서 걸었다. 하늘은 지금 비가 내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짙은 구름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비가 다시 내린다. 급히 우의를 걸치고 조금 걸으니 다행이 지나가는 비다. 아침부터 날씨로 정신 상태가 그로기로 몰린다.

<말미오름에서 조망한 우도와 일출봉, 구름이 잔뜩 어둡다>
<알오름에서 바라본 김녕쪽에 소나기 구름이 내려 앉았다>

구름이 하늘을 가려 제주바다가 뚜렷이 렌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하늘에 잔뜩 뿌려둔 회색 물감들이 제각각의 두께만큼 신비한 광경을 보여준다. 제주는 화창할 때는 화창한 대로, 잔뜩 구름이 하늘을 덮을 때는 또 그대로 감상하는 멋이 있다. 빛의 화가 모네가 이 장면을 봤더라면 틀림없이 켄버스를 여러개 세워 놓고, 동시에 빛의 변화에 따라 멋진 풍광을 그리지 않았을까.

<종달리 해변에서 카이트서핑 중인 사람들>

종달리 해변에선 우도를 배경으로 강한 바람을 이용한 카이트서핑(패러 글라이딩+서핑)을 제대로 즐기고 있다. 강한 바람만큼 파도는 성을 내며 해안으로 밀려온다.

<감자밭에 감자 꽃들이 가지런히 피었다>
<감자꽃, 꽃은 언제봐도 신비스럽고 예쁘다>
<밀밭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어라>
<밀밭이 춤출때 제비가 장단을 맞추는 소리 감상하기>

보리밭과 밀밭을 지날때 마다, 바람이 불면 파도처럼 일렁이는 모습에 2006년 개봉작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항상 생각난다. 영국과의 독립투쟁에 나서는 아일랜드 IRA를 중심으로, 형제간의 갈등을 다루면서 아일랜드 현대사의 비극을 그린,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수작이다.

<균형있게 자리잡은 뱀딸기 무리들>

큰 녀석은 큰 대로,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제각각 균형미있게 포즈를 취해준다. 자연은 항상 정답이다. 책 속에서 다가오는 한 문장처럼, 렌즈에 소담하게 담긴 딸기들도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에 때가 낀 콜레스테롤을 분해시키는 힘이 있다. 길 위에 설 때 느끼는 행복이다.

<성산 일출봉 해안>
<물이 흠뻑 빠져있는 광치기 해변>
<성산일출봉에 일제가 2차대전 말기 뚫어놓은 동굴들>

일출의 명소인 성산 일출봉 해안도 4.3사건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이 일대의 청년들이 서북청년단에 의해 오후가 되면 총소리가 그치지 않을 정도로 무참히 학살된 현장이다. 그 이전 태평양 전쟁말기에는 성산일출봉 해안에 일제가 뚫어놓은 동굴 24개가 있다.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미군 군함을 향해 돌진할 자살공격용 보트를 숨겼다고 한다.

제주는 언제봐도 아름답지만, 알면 알수록 제주도의 온 몸은 상처 투성이다. 그냥 다니면 보이지 않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디딜때마다 보여지는 제주의 속살은, 그 아름다운 만큼 시린 아픔이 뚝뚝 묻어나는 섬이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 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  우리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

김영하, <오래 준비해 온 대답> 中

나이는 누구나 한 해 한번씩 늙지만, 호기심을 잃을때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진짜 늙는다. 그 호기심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 저항하지만, 게을러질려는 세포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다. 책에 관한 블로그를 볼 때마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중국 유협의 <문신조룡>을 들었을 땐 금시초문에 내 바닥을 보았다. 최근에는 조선의 미암 유희춘과 김택영의 <조선시대사 한사경>이란 처음 듣는 이름들로 또 바닥을 보았다. 곳곳에는 고수가 많다. 지역에 유희춘을 위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한다는 해남의 딸을 보며, 세포에서 굳어가는 호기심에 불을 지피는 촉매제가 되었다.

호기심, 그것은 인생을 거꾸로 가게 하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처럼 철들지 않게 움직이는 힘일지도 모른다. 여행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윤활유임에 틀림없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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