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2(수)
17코스 18.1km. 관덕정 ~ 용연 ~ 용두암 ~ 이호태우 해수욕장 ~ 광령천 월대 ~ 광령 1리 사무소
제주올레 코스는 어디에서 출발해도 상관없지만, 제주시에서 출발하는 것을 기준으로 동쪽 시계방향으로 돌면 파란 화살표를 따라 걷고, 서쪽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면 노란 화살표를 따라걸으면 된다. 지난해까지는 숙소를 정하지 않고,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그때 그때 숙소를 정했다. 올해는 성산일출봉 인근에 한달 살기 숙소를 정하곤, 하루 1코스 기준으로 걷고 있다. 성산과 제주는 급행버스로 1시간 10분 정도 걸리기에 점점 버스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오늘 걸을 17코스인 제주시 관덕정에서 광령 1리 사무소까지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걷기에,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걸으면 된다. 그동안 파란 화살표만 보며 같은 코스를 두 번 걸었지만, 오늘은 반대방향으로 걸으니 보이는 풍경이 조금은 색다르게 다가온다. 버스에서도 좌측과 우측의 풍경이 다르듯, 오늘은 같은 코스지만 약간 낯설게 표식을 따라 걷는다.
탐라국 이래 제주의 최고 행정 관청이 있던 자리다. 관덕정에선 활쏘기 시합, 과거시험 등 각종 행사가 이루어진 광장의 역할을 했다. 행정 관청이 신제주로 이전하기 전까지 관덕정은 제주 역사의 중심이었다. 이재수의 난, 4.3사건 등 제주 역사가 이 광장에서 이뤄질만큼 제주에선 상징적인 곳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제주로 유배왔던 광해군이 제주목관아의 망경루 서쪽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과거에는 용연에서 기우제를 지내곤 했다. 주변의 울울창창한 숲과 어울리는 깊은 물은 바다와 맞닿아 있다. 시내에 위치해서 그런지 물은 그렇게 신비감을 줄 정도로 검푸르진 않지만, 수직벽 덕분에 수심이 더 깊어 보인다. 옛날 조선시대 지방관들은 밤중에 배를 띄우고 술자리를 열며 즐겼다고 하는데, 백성이 보기엔 딱한 양반들이었을 것이리라.
용연의 바로 옆엔 용이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린채 굳어있다. 입에 여의주가 없는 것을 보니 신령한 기운이 사라져, 검은 돌로 굳어진 것일까. 여의주가 없는 용은 앙꼬 없는 찐빵처럼, 힘을 잃고 머리만 땅으로 드러낸 채 굳어버린 것일까. 굳은 돌은 말이 없지만, 인간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로, 용두암은 관광객의 사진 배경으로 오늘도 묵묵히 자원봉사중이다.
올래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보리밭이 산재해 있다. 논이 부족했던 제주지역 특성상 1980년 이전까지 보리가 주식이었다. 1980년 이전까지는 지금의 감귤 만큼 중요한 작물이었고, 제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만큼 높았다. 국민소득 증가등의 원인으로 지금은 그 자리를 감귤 등 타작물에 넘겨주고 말았다.
코로나 이전에는 제주공항에 이착륙하는 세계 각국의 비행기를 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 국내 항공기들이다. 한편 지금 제주는 제 2공항을 건설 문제로 시끄러운 것 같다. 제 2공항 건설에 대해 도민의견 수렴 결과는 반대가 우세한데도, 제주도지사는 정상추진을 할려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과연 성장이 우선이냐, 성장보단 행복이 우선이냐의 뜨거운 감자로 제주는 시끄럽다.
엣날 추억의 말뚝박기와 딱지치기가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렌즈에 담았다. 동네 공터에서 저녁 어스름이 내리도록 놀다가, 밥 먹으로 오라는 말에 모두를 집으로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경상도 표준말로 말뚝박기에선 "선욱아, 이번엔 학실(?)하게 제비서(가위바위보) 잘해라. 알았제. 용은이 무게가 무거워 등더리 아파 죽겠다." 딱지치기에선 "영권아, 니는 한번에 학실(?)하게 내리치가 딱지 디바가(엎어서) 성철이꺼 다 따묵어라(가져와라)". 이런 추억들은 그냥 좋은 기억의 책장 속에 넣어두고, 돌아가곤 싶진 않다. 그 추억보다 더한 가난이란 아픈 속살의 깊이가 심대하게 크기 때문이다.
올레길을 다니면서 꼭 저장하고픈 장소가 서너군데 있는데, 그 곳 중 한 곳이 광령천이다. 강정천이 맑고 유량이 풍부하다면, 이곳 광령천은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지점에 천연 수영장이 있다. 주위에는 5백여년의 팽나무와 수백년된 노송들이 광령천을 향해 절을 하고 있다. 또한, 지형이 반달을 닮아 물위에 비치는 달빛이 장관이라고 한다(밤에 오지 않아 본 적은 없다). 달을 감상하는 월대(月臺)에 서서 친한 이들과 교교하면서도 은은한 달빛을 감상하고 싶다.
올래길의 산과 들이 꽃밭이듯, 동네 구비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꽃들은, 회색도시의 정서가 박제되어 버린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그림에 담을 수 없는 새소리와 감귤꽃 향기는 직접 듣고, 맡지 않으면 완성할 수 없는 작품들이다. 톨스토이는 귀족 예술보다는 공공 예술을 주장했고, 일본은 엘리트 체육보다는 일상생활 체육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있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며, 그 외에는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고 보면 더 솔직한 표현일까. 길거리에서 날 것으로 만나는 장면이 생활예술이 아니면 뭐라고 할 것인가.
오늘까지 제주올레 26개 코스 중 절반인 13개을 걸었다. 이젠 기수를 낮춰 착륙을 준비하는 비행기처럼 서서히 기어를 내릴 준비를 해야겠다. 인생 역시 올라갈때보다는 내려올때 욕망도 같이 비우고,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 앉을 준비를 해야겠다.
누군가 경제성장이라는 타이타닉호의 엔진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비상식, 비현실주의적이라고 한다. '전속력으로', '속도를 떨어뜨리면 안 된다'고 하는 상황이 현재의 상황이다.
경제는 성장하지 않아도 좋다. 그 대신 의미없는 일, 혹은 세계를 망치는 일, 돈 밖에는 아무런 가치가 나오지 않는 그런 일을 조금씩 줄여가자는 것이다.
C. 더글러스 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中
제주의 제 2공항 건설 추진하는 쪽은 성장에 방점을, 대부분의 반대의견을 낸 도민은 행복을 강조한다. 저자는 경제성장은 하지 않아도 되며, 그 대신 가치있는 일을 찾자는 것이다. 성장 보다는 분배에 초점을 두는 제로성장과 경제 이외의 것을 발전시키자고 주장한다. 사람을 생산과 소비의 수단인 인재로 보지말고, 인간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국가는 믿을 수 없고, 정부는 정의를 체현하지 않으며, 경영자는 공공성을 갖고 있지 않다. 각자가 스스로 민주화가 되기 위해, 현실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길 주장한다. 경제성장이라는 낙수효과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이 책은 우선멈춤을 권한다. 나 역시 이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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