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056. 탄소없는 의신마을 산골일기 : 신선이 머물고픈 곳

일기/산골일기(하동 의신마을)

by 풀꽃처럼 2024. 11. 19. 13:38

본문

산골에 머무르는 즐거움의 하나는 사시사철 다이내믹하게 자연을 관찰할 수 있어 모든 것이 돈으로 치환되는 도시의 소비 사회에서 몇 뼘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겨울은 뼈가 시리도록 춥고 벌거벗은 나뭇가지와 얼어붙은 땅이지만 봄햇살에 언 땅을 툭툭 해 집고 나오는 새싹들로 희망이 소생한다. 바람이 불면 녹색 숲 전체가 파도처럼 일렁이는 여름, 붉디붉은 단풍이 샛노랑 잎들을 배경으로 빼어난 자태를 뽐내는 가을까지 변화무쌍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모처럼 친구들를 만나 해운대 야경과 함께 달이 보이는 카페에 앉았다

모처럼 도시로 귀환하면 언제나 칙칙한 모습과 밤이면 황홀한 야경을 보면서도 돈으로 등가 된다는 느낌이었다. 마치 완벽한 제품이지만 빠진 부속품이 있는 듯한 낯선 환경이었다. 도시에서 생활할 땐 몰랐던 것들이 산골에 익숙해진 지금, 도시의 삶은 소비 자본주의라는 어항에 갇힌 물고기 같은 느낌이랄까.
 
산골의 삶은 봄부터 어디든 먹을 수 있는 열매들이 손이 닿는 곳에 있다. 앵두와 오디나무, 여름 산딸기와 가을 바람이 불때쯤에는 거리에 떨어진 밤을 까는 재미와 삶아 먹는 행복이 있다. 늦은 가을 대봉감 홍씨로 대미를 장식하는 자연이 주는 먹거리의 줄달음이 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깊은 화개골은 야생차밭이 가파른 비탈길에 연이어 있다. 유해한 농약과 축사가 아예 없다. 시골에 살고 있기보다는 별천지에 머무른다는 표현이 적확하다.
 
쌍계사와 신응사가 자리잡은 곳은 모두 지리산의 한가운데입니다. 푸른 산봉우리가 하늘에 닿도록 장벽을 세우고 있습니다. 흰 구름이 두터운 문을 닫아걸고 있습니다. 아마도 주변 마을에서 밥 짓는 연기조차 여기로는 들어올 수 없을 것입니다.   조식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중
 
칼 찬 선비인 조식은 임란 때 수많은 의병장을 길러낸 인물이다. 벼슬을 몇 번이나 거부하며 중앙에 나아가지 않았다. 두류산(頭流山)은 지리산의 옛이름이다. 백두(頭)산이 흘러흘러(流) 내려온 곳이 지리산이다. 조식이 1558년 4월 지리산을 유람하며 남긴 유두류록에 화개골에서 칠불사와 의신마을로 갈라지는 지역에 대해 ‘신묘한 힘’이 응집하는 곳이라고 평했다.
 
하늘과 맞닿은 지리산 능선의 기운이 모두 이곳 신응동(현재 왕성분교)으로 흘러옵니다. 그리고 다시 화개천을 따라 세상으로 흘러 나갑니다. ‘신응(神凝)’이란 신묘한 힘이 한 곳으로 응집한다는 뜻입니다. 『장자(莊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신묘한 힘이 한곳으로 응집하면 온갖 사물이 상처 나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는다. 그리고 해마다 곡식이 잘 여문다.” 신응동은 곧 모든 지리산의 정기가 한곳으로 모여드는 곳입니다.   조식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중

앞마당에서 보이는 하늘과 맞닿은 삼성산 능선

왕성분교가 위치한 신흥 교차로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잡으면 칠불사가, 우측으로 진입하면 의신마을이다. 내가 사는 의신마을 앞마당에선 저 멀리 청학동이 있는 삼성산이 꿈틀거리며 병풍처럼 둘러있다. 의신마을 대성골에서 세석을 거쳐 삼성산, 불일폭포에 이르는 구간이 지리산 남부능선이다. 지리산은 빨치산의 주요 근거지로 의신마을에는 남부군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도 있을 만큼 의미가 있는 곳이다.

마을 뒷편 계곡에 숨어 있는 이현상 바위

의신마을 안에는 서산대사가 15세 때 출가했다는 원통암이 산중턱에 있다. 원통암은 지리산의 배꼽이기도 하다. 신라시대 당나라 유학까지 다녀온 최치원은 신분제인 골품제의 벽에 부딪혀 이곳 화개동천으로 들어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동천(洞天)은 산수나 경치가 빼어나 신선이 사는 곳, 신선이 내려와서 놀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란 의미다.
 
지리산의 정기가 모인 곳, 지리산의 배꼽, 남부군 이현상의 최후 격전지, 신선도 머무르고 싶은 곳, 이제 곧 겨울이 더 깊은 추위로 들어갈 때쯤 고로쇠 채취 준비작업으로 마을은 바쁘리라. 메이플 시럽을 만들 수 있는 고로쇠 수액의 청정한 단맛으로 내년 한 해도 도시에선 맛볼 수 없는 소소한 행복 릴레이가 시작되리라. 어제부터 급강하한 날씨는 막아두었던 아궁이를 열고 나무로 군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