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은 편지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고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새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이 시는 1987년 1월 14일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즉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의 시대적 죽음을 생각하며 쓴 시다. 당시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진실을 감춤으로써 온 국민의 마음에 분노의 불을 질렀다.
정호승,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中
2000년 개봉했던 <공동경비구역 JSA>의 OST로, 김광석이 불렀던 곡으로 나의 애창곡이다. 이 가사가 1987년 박종철 군의 죽음을 생각하며 쓴 시라고 생각하니 더욱 애잔하면서도 희망의 물줄기를 본다. 풀잎은 쓰러지지만 하늘을 보고, 꽃잎처럼 보내지만 작은 눈물 한방울이 강물이 되고, 노래가 되리라는 희망은 민주화의 불씨가 되어 타올랐다.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난 종의 파편 하나하나에도 맑은 종소리가 난다는 것처럼, 광야같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매일 지친 몸을 이끌며 힘겹게 살아갈지라도, 코로나 역병으로 스트레스에 담금되었을지라도, 그 상처나고 깨어진 조각조각 하나에서도 두드리면 희망을 들을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의 시들은 하나하나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야 보이는 것들이 많다. 시와 그 시에 대한 산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순서없이 어디를 펼치더라도 한 편의 작품이다. 그러나, 펼쳐보니 단숨에 읽고 마는 마약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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