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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산다는 건(3) : 산복도로 걷기 - 천마산 조각공원 ~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 감천 문화마을

부산에 산다는 건

by 풀꽃처럼 2021. 12. 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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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걸은 곳 : 누리바라기 전망대 ~ 천마산 조각공원 ~ 최민식 갤러리 ~ 아미동 비석 마을 ~ 감천 문화마을

"부산에 산다는 건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갔다가 차가운 냇가에 뛰어드는 것처럼 극명한 차이를 느끼는 매력적인 생활이다."

지난 산복도로 산책에 이어 오늘은 남부민동에서 시작해 천마산 조각공원을 거쳐 아미동 비석마을과 감천 문화마을을 산책할 예정이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골목길 가파른 계단들

충무동 새벽시장 정류소에서 하차후 초입부터 오르막이다. 천마산 조각공원으로 걸어 가는 길은 어깨와 어깨가 부딪혀 지나지도 못하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야 한다. 산복도로에서 골목길을 걷는다는 건 등산한다는 의미다. 초겨울이지만 조금만 걷다 보면 땀은 등에 피어 나고, 입에선 거친 엔진 소리와 격한 바람이 나온다. 그렇게 10여분을 오른다.

천마산 중간지점의 누리바라기 전망대에서 조망한 경치

왼쪽에는 한 시절 부산의 상징처럼 솟았던 용두산 타워가 초라해 보인다. 오른쪽 아래에는 영도대교와 부산대교가 인접해 있고, 북항을 가로지르는 부산항 대교도 보인다. 저 멀리 해운대의 고층 빌딩과 우뚝 솟은 100층 건물인 엑스 더 스카이 빌딩이 보인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중심지였던 충무동, 남포동이 근대의 모습으로 변신해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천마산 전망대에서 조망한 남항대교와 태종대

천마산 전망대에선 남항대교와 배들이 정박하는 묘박지(錨泊地)엔 많은 배들이 점유해 있다. 묘(錨)는 배의 닻을 의미한다. 차들이 주차장에 파킹하듯 배들이 닻을 내려 정박하는 곳이다. 남항대교를 건너면 영도의 흰여울 마을과 끝지점엔 태종대가 보인다. 부산은 산과 강, 바다를 볼 수 있다. 근대와 현대가 뚜렷이 공존하고 있다. 해운대와 서면, 온천장과는 다른 산복도로의 굴곡진 모습을 뚜렷이 대조할 수 있는 선이 굵은 도시가 부산이다.

천마산 정상의 조각공원
포크를 미끄럼틀 삼아 털을 곧추세운 고양이
천마산에서 바라본 영도 깡깡이 마을

깡깡이란 말은 배를 수리할 때 연장으로 배를 두드릴 때 나는 소리가 '깡깡' 울린다고 해서 이름이 불리어졌다. 배를 바로 바다에 내릴 수 있도록 긴 철판들이 바다를 향해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영도대교를 건너 깡깡이 마을을 걸으면 쇠소리와 쇳가루, 사람보다 더 큰 배의 부속품을 볼 수도 있다. 마치 근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는 느낌이 든다.

가난을 찍었던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 갤러리 입구 벽화

'컴컴한 비리와 칙칙한 비리와는 타협하지 않고 휴머니즘에 모든 걸 바쳤다'라고 적혀있다.

최민식 갤러리 내부
사진 한 장 한 장이 밑바닥 인생을 처절히 묘사한다

버스를 바라보는 쓰레기를 주웠던 넝마 소년, 한 다리를 잃고 나무 하나를 의지해 걷는 소년, 제 몸집 보다 더 큰 짐을 짊어지고 생계를 꾸렸을 우리 아버지들의 뒷 모습 등 최민식 작가의 흑백 사진은 하나하나 절절한 모습을 적확하게 포착해 낸다.

"감정 없이는 카메라를 들 수 없으며, 감정은 삶의 체험에서 나온다"

인생 철학의 핵심은 그것을 생존시키는 것이다. 생존 시키려면 그것을 생활화해야 한다. 말이 아니라 행동이 사람의 인생철학이 타당한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알든 모르든 간에 사람은 누구나 철학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생각대로 그런 사람이 된다.
그의 노트에 적힌 내용이다. 돌이켜 보면 노트에 적힌 그대로 삶을 살았던 최민식 작가가 아닐까. 갤러리는 크지 않지만 사진 한 장 한 장의 울림은 작지 않다. '당신은 생각대로 그런 사람이 된다'는 마지막 문장이 가슴에 내려 앉는다.

아미동 비석마을에 있는 학생 동상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유독 가난한 아이들이 모였던 학교였다. 그 중에서도 아미동과 감천동, 하단에서 통학하는 친구들은 극강의 가난한 곳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이곳의 집들은 다닥다닥 미로처럼 꾸불꾸불 이어져있다. 미어터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을 모습과 그나마 남녀 학생이 함께 있어 설레임은 있었겠지.

아미동 산비탈의 집들에 하나둘 불이 들어온다
아미동 비석 문화마을 지도

아미동 산 19번지 일대는 일제 강점기 시절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이었다. 6.25전쟁으로 부산에 도착한 피난민들이 이곳에 정착했다.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던 이 곳은 피난민들의 움막으로 대체되었고, 공동묘지의 비석으로 축대를 쌓거나 계단을 만드는 자재로 활용했다. 죽음의 표석이었던 비석과 생명을 향한 갈망이 결합된 한국 근대사의 아이러니한 현장이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가는 골목을 걷다 보면 비석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이웃한 감천 문화마을은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아 현대적인 관광지로 새로 태어나 근대의 맛은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비석 마을은 다행히(?) 개발이 되지 않아 근대의 기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가스통을 바친 돌이 비석이다
수돗가의 아래쪽 계단도 비석이다(일본 명치 35년이면 1902년이다)
축대 조성에 쓰인 일본인 묘비
축대에 많이 사용된 일본인 묘비들(일본 명치 42년은 1909년이다)

처음엔 묘지 마을 안내도를 찾지 못해 골목을 오르락 내리락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자세한 위치가 나오지 않았다. 마침 외출하는 동네 어르신께 여쭤보니 안내를 자세히 해주셔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국 여행의 장점은 내가 한국어, 특히 타지역은 해석하기 어려운 부산 사투리까지 구사하는 고급 레벨이어서 말하기와 듣기를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했다. 기분이 좋았다. 중국이나 일본이었다면 생각은 머리에서 넘치는데 단어가 나오지 않아 답답했을 것이다. 중국어의 경우 문장은 성조가 없어도 원어민이 알아 듣지만, 단어의 경우 성조가 틀리면 전혀 다른 뜻이 되기에 아마도 십중팔구 원하는 장소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어라도 완벽하게 말하고 들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피난민 시절의 감천 문화마을 (최민식 갤러리)
감천 문화마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물고기 형상 (입구에 위치)
감천 문화마을 전경 1
감천 문화마을 전경 2

감천 문화마을은 앞집이 뒷집을 가리지 않는 계단식 주거형태와 파스텔톤의 아름다운 색채, 모든 길이 통하는 미로같은 골목길이 있어 한국의 마추픽추, 산토리니라 불린다.
감천 문화마을의 하늘마루 전망대의 안내 표지판에 소개된 내용이다. 글쎄다. 보기에는 나쁘지 않다. 주도로의 뒷편에 있는 주거민들은 여전히 가파른 계단을 이용해 삶을 살고 있다. 메인 도로는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볼 수 있는 천편일률의 상점과 상품들이다. 미국에 있는 친구가 일전에 부산왔을때 들른 후 하는 말이 "내가 어릴때 자랐던 동네와 별다를게 없네"라고 시큰둥하게 말했던 내용 그대로 별 감흥은 없다. 지금 세대의 사람들에겐 화려한 조명과 좁은 골목이 포토존에 들어갈 데이트 장소일 뿐이다. 마을 개조는 성공했지만 주거민의 삶이 나아졌는지는 의문부호가 남는다. 그래도 버스와 지하철 요금으로 색다른 산토리니와 마추픽추 비슷한 곳을 경험하니 나쁘진 않다.

감천문화마을 점등식 기간(11.12~12.10) 불을 밝힌 거리
아름다운 불빛처럼 작은 집에 살고 있는 삶도 행복할까. 폐가도 드문드문 확인했다.

부산 도심지의 삶에 익숙해졌던 모습에서 근대로 이동한 시간이었다. 부산에 산다는 건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갔다가 차가운 냇가에 뛰어드는 것처럼 극명한 차이를 느끼는 매력적인 생활이다. 삶에 지칠 때 감천문화마을 보단 차라리 곁에 있는 아미동 비석마을 걷기를 추천한다. 6.25 피난민들의 애환이 골목골목에 보존된 좁은 골목길을 걸으며 현대에 살지만 근대를 체험하는 좋은 시간이 되리라 확신하다. 다른 말로하면 딱딱해진 뇌를 말랑말랑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뇌 근육이 단단해 진다는 말과 동일하다. 많이 걸어서 피곤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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